'아파트병'에 걸린 어느 빌라 거주자의 넋두리
"내가 아는 어떤 여자(37세, 독립적이고 똑똑하다)는 부동산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됐다. 집을 사고 싶어 하고, 집을 욕망하고, 자기가 살 수 있는 가격대를 한참 벗어난 집들을 보려고 차를 몰아 찾아간다. 이렇게 집을 찾아다니는 일이 실질적이라기보다는 은유적이란 걸 자신도 이해하고 있고, 그런 지리적 이동으로는 자기 인생의 다른 구멍들을 메우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몽상은 그에게서 저항할 힘을 모두 앗아간다. 만약 OO만 가질 수 있다면 자기 인생의 근본적인 뭔가가 변화되고 개선되고 인정받고 주물러져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출 수 있을 것만 같다. 돈으로 산 정체성, 그렇게 확보한 소속감."
-『욕망들』, 캐럴라인 냅
두 살배기 아이를 키우는 친구 A는 빌라에 살면서 아이를 키우는 고립감에 대해 말하며 아파트로 이사 가기를 소망했다. 좁은 골목의 넘쳐나는 차들을 피해 실제로 유아차를 밀고 나가기란 곡예에 가까우며, 그 안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이웃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란 이뤄질 수 없는 꿈 같다.
최근 A는 아파트로 이사 갔다. 그녀의 카카오 프로필 사진에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아이 사진이 자주 올라온다. 단지 내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친해져서 문화센터도 가고, 키즈카페도 가고, 여기저기 잘 다닌다고 한다. 그녀의 고립감은 해결되었을까? 프로필 사진들만 보면 그런 것 같다. 아파트 주민의 정체성, 그렇게 확보한 소속감. 고립감은 이러한 단어로 대체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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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에 사는 나 역시 아파트로 이사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아파트병’을 앓고 있다. 우리 동네의 아파트 단지 앞에는 커다란 놀이터가 있다. 그 단지는 주차장이 넓고 밝아서 나 같은 초보자도 주차가 용이하며, 커뮤니티 시설도 잘되어 있어서 1만 원만 내면 헬스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반면 우리 집에서는 놀이터까지 가는 데 30분이나 걸리기 때문에 자주 오갈 수가 없다. 나도 아이를 데리고 어딘가에 같이 놀러 갈 만한 또래 엄마를 사귀고 싶은데 그것도 여의찮다. 요는 아파트에 가면 편의시설이 있고 관계도 쉽게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빌라에 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아파트 전세가는 나날이 갱신되는 중이고, 빌라 매매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가 아파트 전세로 가려면 대출을 끼고 이자를 지불해야 하며, 관리비도 지금보다 네 배는 더 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비용에 더불어 주거 상향으로 인한 비용을 나는 감당할 능력이 되는가? 아파트가 과연 내게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줄 것인가? 요즘 내가 가장 자주 부딪히는 질문이다.
어떤 날은 예스이고, 어떤 날은 노이다. 가령 아이와 잘 놀아준 날에는 지금처럼 계속 빌라에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컨디션이 안 좋고 날씨도 구리고 남편도 아이를 데리고 놀아줄 만한 여력이 없는 날에는 이 모든 게 아파트에 살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로 보인다.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은 차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는 게 아니라, 쾌적한 아파트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면 나 같은 초보 운전자도 차를 몰고 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비 오는 날에는 키즈카페에 가서 애를 풀어놨을 텐데, 아니면 어디 박물관에 갔을 텐데 기타 등등의 가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만약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나는 자격 있는 부모가 되었을 텐데’라는 열등감에서 시작해 ‘만약 내가 고정 수입이 있는 일을 했더라면, 최저 시급이라도 받는 일을 하고 있다면 이런 고민은 하고 있지 않을 텐데’라는 자괴감으로 순식간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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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파트로 대변되는 부모로서의 정체감, 소속감을 돈으로 사고 싶은 욕구이기도 하다. 그것은 키즈카페, 수영장, 근교 여행, 문화센터 수업, 계절에 맞는 옷으로 치환될 수 있다. 내가 부모로서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날에는 새벽에 깨어 언급한 이 모든 목록을 하나하나 결제한다. 아파트를 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자잘한 쇼핑을 남발한다. 너무 많이 결제했다 싶은 날에는 당근마켓으로 간다. 당근 약속을 잡아 남편을 내보내고 건져 온 전리품들을 보며 의기양양해진다.
어제는 어린이집에서 한 할머니가 물었다. “아기 자전거에 달린 차양은 따로 구매한 거예요?” 나는 속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겸손한 척 답했다. "중고로 산 거라 잘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있었는데….“ 사실 그 차양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아이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각도가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 얼굴이 타는 게 걱정되면 챙모자 하나 씌워주면 충분하다고 말해줄걸.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하나라도 나은 물건을 사주었다는 만족감에 차 있었다. 써놓고 보니 토할 것 같군.
‘소유=부모 자격’이 되는 세상이라지만 아이가 평화롭게 잠든 얼굴은 그 모든 게 다 나의 망상일 뿐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부족하다는 느낌, 더 노력해야 한다는 느낌. 그것은 사실 오래전부터 내가 나 자신에게 가지고 있던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안달복달하며 불안해하기보다는 자신을 수용하는 감각을 길러주고 싶은데, 정반대의 롤모델을 보여 주고 있다. 더 많이 원하고 노력하여 탈진할 것 같은 상태를 말이다.
반면 남편은 수용적이고 만족한다. 남편은 말한다. “이 정도면 충분한데? 아냐, 우리는 잘하고 있어.” 그것이 나를 편하게 만들지만 복장 터지게도 한다.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아이의 발달단계에 맞춰 필요한 용품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한 이후로 나는 가난하다는 감각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의 욕구는 대체로 소박하고, 아파트 같은 비싼 물건은 가지고 싶다고 원한 적도 (거의) 없었다(부동산 폭등하기 전에 아파트를 살까 잠시 고민한 적이 있으나 대출금 무서워서 그만뒀다. 왠지 아파트는 평생 내가 가질 수 없는 물건 같고, 두려움까지 든다. 그것을 가지면 내게 중요한 뭔가를 내어줘야 할 것 같다. 아마도 글쟁이로서의 시간이겠지).
결혼 전의 나는 반지하에 가난하게 살면서 늘 욕구를 청교도적으로 대하는 법을 장착했고, 그 패치는 결혼 후에 남편의 수입이 더해진 후에도 그대로 작동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용돈은 비슷하다. 글 쓰고 책 만들기라는, 돈 안 되는 직업을 사치스럽게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외의 영역에서는 돈 안 쓰는 습관으로 가계부의 균형을 간신히 유지해 왔다.
하지만 부모가 된 후로 가난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발달상에 필요한 것은 챙겨주고 있는데, 자꾸 남과 비교하게 된다. 남들이 아이에게 해주는 것을 나도 해주고 싶다. 돈을 벌고 싶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이 위기감의 정체는 ‘나의 가난을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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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이런 기사를 읽었다. 부유층은 아이를 많이 낳고 중산층은 출산을 주저하고 있으며 빈곤층은 출산을 아예 포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아이가 없을 때의 나는 돈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있었으나, 아이가 생긴 후에는 계급 사다리의 끝에 매달린 부모로서 있는 힘을 다해 달려도 가망 없는 레이스를 시작했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이 경주에 참가해서 중산층 이상의 출신들과 경쟁해 본 사람으로서, 출발선에 서기까지 죽을힘을 다해야 하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들이 가진 내적 자원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좌절감만큼은 정말이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 내적 자원은 대개 이런 것이다. 나는 더 나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해도 된다는 욕망에 대한 수용, 이 세계에는 내 자리가 당연히 있을 거라는 권리감 같은 것.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내가 나의 부모만큼 가난한 환경을 제공할 것 같지는 않다(그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부유한 사람들만이 부모가 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가난을 느끼기 쉬운 환경인 것도 사실이다. 그와는 별개로 자기 수용, 자격, 권리감을 과연 돈으로 살 수 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24평의 아파트 전세를 살게 된다면, 24평 아파트 자가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은 32평 아파트 자가, 더 좋은 학군에 속한 신축 아파트로 옮겨간 다음에는 그 동네 아이들이 다닌다는 학원을 눈여겨보겠지. ‘만약 OO만 한다면’의 목록에는 끝이 없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가오나시처럼 부모로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구에는 끝이 없어서, 마침내 원하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배부른 줄 모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애가 서울대 가면 끝날까?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직장인까지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나라에서, 평범한 노동자들이 기간제로 최저 시급을 받으며 자고 나면 높아지는 부동산 가격에 절망하는 나라에서, 위로위로 올려보내고 싶다는 부모의 욕망은 끝이 없다. ‘능력’에 입각해 ‘공정’한 경쟁을 벌이고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이 부를 거머쥘 수 있다는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른들은 알고 있으니까.
우리 사회는, 정치는 ‘평등’이라는 가치를 애저녁에 포기한 것 같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그런 말들이 인기 있던 때도 있었는데.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아파트병’에 걸린 것 자체가 평등보다는 경쟁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내게 아파트 거주는 경쟁을 위한 출발선 앞에 본격적으로 서겠다는 입장권 같은 의미다.
키즈노트의 알람이 나를 현실로 돌려보낸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이 어플에 아이를 관찰한 결과를 구체적으로 적어준다. 아이가 어떤 활동을 즐겁게 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며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에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해 주는 넉넉함이 보인다. “오늘도 OO 했으니 칭찬해 주세요~”로 끝나는 알림장을 보고 있자면 생경하다. 음, 이런 것도 칭찬해 주라고? 그건 기본이잖아? 퍼포먼스에 대한 높은 기준, 재미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새어 나온다.
겪어보지 못한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생각한다. 뭐 애를 잘 키울 생각을 하냐, 나나 잘 키우자. 부모로서 가난하다는 감각을 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있는지는 알 수 있다. 무엇을 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속에서 보이는 풍경들이 있으니까.
* 이 글은 딴지일보에도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