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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네치카 Aug 21. 2021

이사의 역사

어릴적 꿈은 '서울 사람'이었다. 지하철 환승과 광역버스와 멀어지는 삶

 이사를 앞두고 있다. 잠시나마 "서울 사람" 이었는데, 다시 지하철 환승과 빨간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경기도민"의 삶으로 돌아간다. 지금 사는 집은, 직주근접이다. 일단 회사까지 걸어서 20분, 백화점도 걸어서 20분, 공원 걸어서 5분, 지하철역 걸어서 5분인 역세권, 팍세권이다. 단, 원룸이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이 뷰가 아니었다면 2년이란 시간을 살아내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이 작은 방에도, 이사가려니 포장할 것이 많아 며칠을 걸려 짐을 싸고 있다. 이 바쁜 와중에, 그 동안 방치해 둔 브런치에 다시 접속하게 된 것은 어제 밤 울린 알람 때문이다. 나를 기다리는 독자가 있을까? 싶지만, 뽑아주면, 열심히 한다고 해 놓고, 뽑아놓으니, 제 이익만 챙기는 정형화된 종류의 사람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브런치 알람 문구가 따스하다. 협박조나, 뒤떨어진 애 취급하지 않는 게 좋았다. 요즘 종종 그런 광고를 본다. "벌써 8월인데 해놓은게 없으시다구요?" 따위의 문구들 말이다.


 나의 이사의 역사를 돌아보니, '서울사람'으로 편입하려는 부단한 노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경기도민으로 회귀하는 반복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잠시 살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이후로는 아빠의 직장 위치 변경으로, 나는 대학 진학 전까지 인천에서 자랐다. 가끔 아빠가 바쁘시면,엄마는 내 남동생과 나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부평역에서 1호선을 타고 외갓집인 서울 영등포로 향했다. 내리면 또 버스를 타는 삶. 어릴때도 오래 서 있는 걸 싫어하던 나는, 때때로 지하철 바닥에 앉아버려 엄마를 피곤하게 했다. 가끔 사람많은 1호선을 타면, 나는 초딩 시절에도 '서울의 삶'은 몸이 많이 아프구나 라고 느꼈었다. 향후 내 삶이 지속적으로 그렇게 될지는 그 때는 몰랐다.

 처음으로 이사를 가고, 부모님께 독립한 건 대학교에 진학하고 난 후다. 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고, 고3의 지긋지긋한 힘든 삶을 벗어나는 것도 기뻤지만, 무언가 당당히 '서울사람' 자격을 얻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나는 대학 첫 해, 기숙사도 당첨되어 건축학과를 다닌 눈이 크고 예쁘장하게 생긴 룸메이트 라는 것도 처음 가져보았다.

 나는 ‘서울 사람’ 을 늘 꿈꿨지만, 서울에 거주지를 갖게 되면, 의외로 오래 살지 못한다. 최대 3년이다. ( 지금 이 집도 딱 2년째다.) 기숙사는 심지어 학교 안에 있어서, 교통비도 안들고, 좋았지만 수업을 끝내고 돌아와도 "집" 같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학교 안에 있는 삶, 학교 안에서 가지게 되는 감정적 고조 (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를 어디에 소진할 시간이나 풍경도 없이 학교에 내내 머무는 삶. 기숙사는 쌌고 좋았지만, 화장실과 샤워실이 따로 있어서, 겨울에 샤워하거나, 밤 늦게 화장실이 가고 싶을때 느껴지는 불편, 밤새 내내 불을 켜놓고 공부하던 룸메이트 등의 사유로 나는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인천에서 다시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꾸었던 꿈은 '서울 사람'이 되는 것. 그러니까 서울에서 자고, 먹고, 학교가는 삶. 저녁 9시가 넘어서면 초조해지는 내가 싫었다. 아무리 즐겁고 흥겨워도 밤 10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때, 지하철을 타면 나와 같은 이동 경로를 가진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1시간 내내 서서가야 했다. 어쩌다가,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려 구두를 신고 나간 날이면, 냄새가 안나는데도, 그냥 그 자체로 술냄새와 사람들의 피곤으로 푹 절여진 지하철 안에서, 발이 아파 고통스러웠다. 구두를 버리고 맨발로 집에 가고 싶은 기분. 나는 고등교육을 받은 문명인이이므로,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 때마다 참았다. 경기도민의 삶은 이토록 고달프다. 혹시, 이런 삶을 겪어보지 못한 분 들께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경기도민의 삶'의 짤들을 추천한다.

 

지하철을 탈때보다, 광역버스를 탔는데 꽉 막히면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지금 나이에는, 사실 체력이 딸려서 힘든거다. 어릴땐 정말, 아쉬웠었다.

   다시 2년 후에, 취준생 시절 나는 서울의 고시원으로 이사를 갔다. 고시원에서의 삶은 눅눅했다. 잠만 자는 곳, 창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은 환기 이상의 구실은 없는 창, 침대에 눕고 , 책상에 앉고, 화장실에 가는 아주아주 기본 동선만 있는 컴팩트함. 나는 얼마 안 있다,미련 없이 다시 경기도민의 삶을 택했다.

 그 뒤로, 내가 나름 집 같은 서울 집에 살게 된 것은, 직장을 다니면서 부터다. 내 힘으로 보증금을 마련하고, 다세대 빌라에 처음 입성했을때의 뿌듯함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또 문제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나름 너무 으슥하지 않은 곳에 집을 구했는데도, 당시 야근을  먹듯이 하던 나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내내 긴장됬었다. 그런 의 두려움에 방점을 찍은건, 새벽 2시정도였나 모르는 사람이 벨을 누르고 문을 열려고 시도하던  ,  한해 놀람과 공포를 감당할 에너지를 하루만에  소진해버렸다.

  지금 사는 이 집이,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서울의 집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고층이며, 가장 아름다운 뷰를 가지고 있다. 이사가는게 못내 섭섭할 정도다. 그런데 여지껏 나의 이사의 역사를 보면, 질리기 전에 늘 떠나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싶다. ( 그러면서 회사는 왜 그토록, 오래도록 같은 곳을 다니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반문하게 된다.)

  최근 많이 오른 집 값을 보면, 나는 아마도 평생 서울의 집주인이 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게 다 꿈만 가져서다. 그리고 어차피 꿈이였는데 '서울 사람' 아 아니라' 강남 사람' 정도는 됬어야, 했는데 이제 글러버렸다. 올해 코로나로, 집에 있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이 아름다운 뷰와 환상의 위치를 가진 오피스텔 원룸이 살기 갑갑해졌다. 꼭 서울이 아니어도 좋다.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나를 안락하게 맞아 줄 집이 필요하다. 이러다 지쳐갈 때 쯤이면, 혹은 부동산이 안정화되면 다시 서울로 또 돌아오겠지.


PS. 그래도 지금 이 집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서울의 풍경은 오래도록 그리워 할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불꽃놀이를 이 좋은 전망에서 보지 못한것이, 한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 같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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