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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r 25. 2024

우리는 울며 떠났다

첫째는 유난히 시골 낡은 집을 좋아했다. 낡은 집과 낡은 옷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아도 가졌다. 집안의 생명들을 소중히 여겼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 했다. 첫째와 외모가 똑 닮은 둘째는 유난히 시골 낡은 집을 싫어했다. 낡은 집과 낡은 옷을 부끄러워하며 지저분한 것은 유독 참지 못하는 깔끔함을 지녔다. 집안의 생명들을 첫째와 마찬가지로 소중히 여겼지만 그래도 벌레가 많은 것과 잠자리 어둠 속에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지네 같은 벌레를 두려워했다. 어쨌거나 둘은 시골이 좋은 이유가 어렸을 때는 자연이었지만 이제는 친구들이다. 그들의 사랑이 인간에게 향해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굉장히 행복한 일이었다.

경북의 시골로 교류신청을 하려 했지만 교육청 담당자 답변은 해봤자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지역 학교에 전화를 해서 같은 과목 선생님들 중 경기도로 올라갈 분이 있는지 문의했다. 내신 철이 다가올수록 나는 몸이 닳았다가 바닥으로 침잠했다가 오락가락 감정선을 타며, 시골에 더 머무를 방도를 모색하는데 골몰했다. 그러다 결국 포기. 아무도 교류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살던 아파트로 돌아가기로 결정되자 추위가 오지 않았는데도 몸과 마음이 으슬거려 온돌방에 누워 끙끙 앓았다. 남겨두고 가야 할 것들이 더없이 귀하게 느껴져 꿈에서도 나는 흐르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아이들에게 1년 동안만 머물기로 한 시간이 3년이 되었고 이만하면 너희에게 더없이 좋은 유년을 선물한 것이 아니겠냐고 입을 열었다. 엄마도 이제 생계를 위해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도시의 집을 비워두면서 경제적 손실도 많은데 부동산 시장이 좋지 않아 팔리지 않으니 시골에 집을 살 수도 없는 일이라고, 구구절절 아이들을 설득했다. 그 설득은 나를 향한 것이었음을 말할수록 느꼈다. 아이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왜 엄마의 사정 때문에 우리가 강제로 올라가야 하냐고, 여기가 좋은데 왜 억지로 가야 하냐고.

나는 되풀이하여 아이들을 설득했지만 종내 울었다. "나도 정말 올라가기 싫은데 방법이 없잖아. 나도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고." 애들 앞에서 엉엉 울었다.  아이들은 억지를 부리며 울다가 종내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해 가을과 겨울, 우리가 아끼는 것들과 더없이 소중한 사람들과 하루라도 더 보기 위해 애썼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더 간절히, 더 진심으로.


둘째가 유치원을 졸업하던 날, 첫째가 종업식을 하던 날. 동네친구들은 엊그제 만났는데 또 마지막이라며 파티를 열어줬다. 아이들은 달빛 아래에서 서로를 안아주었고, 서로 잊지 말자고 동맹을 맺었다. 이별을 앞두고 수도 없이 많았던 파티들, 파티를 가장해 한 번 더 얼굴 보았던 시간들, 그 인간적인 따뜻함에 기대어  도시로 떠나는 나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나의 두려움은 아이들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 학교 적응이라던가, 앞으로의 교육이라던가 그런 것들로 종착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조용히 고민을 들어주었던 이웃들은 그들 깊은 곳에 간직했던 따스함을 건네주었다. 사람들의 온정이 있었던 시간들. 나는 그들이 가진 온정 덕에 인생의 가장 절정에 서 있음을 알았다. 시니컬한 나라도 인간을 애정할 수 있음을 깊이 믿게 되었다.


그 여운을 끌어안고 안고 우리는 상경했다. 3년 전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촐하게 차 트렁크에 입을 옷과 이불, 책을 싣고. 우리는 집 앞 톨게이트를 지나지 않고 부러 상주 시내를 통과하여 북상주 IC에서 차를 올렸다. 톨게이트에 진입해 고속도로를 타자마자 나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참을 수 없어서 엉엉 울었다. 아이들은 정말 엄마도 떠나기 싫었구나,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면서 같이 울었다. 아마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은 시골집으로 올 것이다. 적어도. 그래도 매일매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슬펐고 아렸다.


상주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조금 두려워졌고 강하게 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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