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매챔, 쿤얌, 매홍손
Day 2.
아침에 일어나니 간밤에 모기들에게 꽤나 많이 수혈을 해준 것 같다. 가려운 몸을 긁적이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모기장을 들추고 침대를 벗어났다. 같은 도미(토리)에서 하룻밤을 공유한 중년의 라이더는 이른 아침부터 묵묵히 길을 떠난 모양이다. 헝클어진 이불만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햇살을 받기 위해서 나무로 만들어진 도미의 여닫이 문을 열고 나오니 호스트 가족의 아들이 루크에게 커피와 아침식사를 내어주고 있다. 부스스한 머리로 옆자리에 가서 앉자마자 필릭스도 숙소에서 나와 담배를 문 채로 눈인사를 건넨다.
게스트의 식사를 위한 공간은 지난밤에는 바(Bar)로 쓰였던 공간인데, 아침에 보니 온갖 빈티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흥미롭게 물건 하나하나를 훑어보고 있으니 주인장 아들 녀석이 각각의 스토리를 얘기해준다. 2차 대전 직후에 일본군이 본인의 할머니에게 남기고 갔다는 가죽 가방을 자랑할 때 즈음엔 그의 눈이 1.7배는 더 커진 것 같다. 이 깊은 산속까지 일본군이 들어왔었나- 하고 생각하니 괜한 소설의 이야깃거리로 쓰일 만한 픽션들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푸른 눈의 두 여행자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필릭스는 이미 수년간 태국에 거주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그의 바이크를 주변으로 내달리는 쿨한 사내다. 루크는 이제 막 태국에 도착해서 영어를 가르치며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다. 물론 필릭스가 계속 그의 마음에 바람을 넣어주고 있었다. 내 스쿠터를 보더니 저걸 타고 계속 달릴 예정이냐고 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니 굿 럭- 이라는 답을 붙여주었다. 참고로 필릭스의 바이크는 꽤 컸고, 루크는 나와 같은 125cc지만 기어를 변속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루크가 영광의 상처를 보여준다. 어제 열심히 필릭스를 따라오다가 커브에서 한 번 엎었다고 한다. 쓰라리기는 하겠지만 여행자의 스토리에 또 한 줄을 추가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내 왼팔에 남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나는 빠이(Pai)에서 한 번 엎었지.
배도 부르고, 두 녀석의 줄담배에 신선한 공기가 그리워 숙소 근처를 걸었다. 매챔에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이 하나 있어 그 주변부로 시장도 있고, 기다랗게 이어진 길을 따라 가옥들이 자리해있다. 소소한 골목도 있고, 자잘한 풀도 많아 대단한 느낌은 아니라도 아기자기한 느낌이 있었다. 기분이 한층 좋아진 채로 숙소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간다. 떠날 시간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필릭스와 루크는 이미 가벼운 짐을 메고 바이크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주인장 아들 녀석도 같이 나와서 커다란 그의 산악용 바이크에 시동을 건다. 그리고는 귀엽고 초롱한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마을 근처에 끝내주는 경치의 계단식 논이 있어. 지금 가면 딱인데. 같이 갈 테야?"
"아, 나는 샤워하고 짐 싸면 조금 걸릴 것 같아. 먼저들 가."
간밤에 흐트러 놓은 짐이 괜히 아쉬웠다. 그래도 여행 시작부터 길을 서두르다가 괜한 실수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현지인이 추천하는 곳이 사뭇 궁금했으므로 구글맵을 켜서 위치를 받아두었다. 환상적인 드라이빙 스킬(Skill)로 금세 따라잡기로 하고.
서둘러 샤워를 하고 짐을 구겨 넣었다. 어제 익힌 대로 바이크에 단단히 배낭을 동여맸다. 가방끈이 조금 위태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대안은 아직까지 없다. 그저 잘 버텨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폰 거치대에 지도를 켜고, 시동 버튼을 누른다. 부릉- 하고 출발.
기분 좋은 바람과 날씨가 시작부터 마음을 비행기 태워준다. 앞선 녀석들을 따라잡을 생각에 손목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부드럽게 치고 나가는 바이크와 단단히 여며진 배낭의 균형이 마음에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토바이를 교체한 일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사실 지난달의 바이크(흰둥이) 녀석과도 꽤 합이 잘 맞았다. 하루에 150km 이상을 주파하기도 하고, 흰색과 빨간색의 조합이 괜찮았다. 녀석을 고른 이유는 다른 녀석들보다 카울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삥을 고르지 않고, 잔뜩 상처가 난 녀석을 골랐기 때문에 자잘한 생활기스나 좁은 공간의 주차 등에서 자유로웠다. 완전히 새 것 같은 바이크도 두 대나 있었는데, 왠지 한 달이라는 기간 이후에는 어느 것이든 무엇 하나 트집이 잡힐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흰둥이를 골랐고, 녀석과는 한 달간 무리 없는 동거를 하였다. 다만 타는 동안에 한 번 (뒷 타이어) 펑크가 나서 튜브를 새로 갈았는데, 그때의 순간적 불안했던 밸런스가 아직 생생했다. 장거리 출타를 위해 이리저리 살펴보니, 타이어가 전체적으로 마모도가 있었다. 특히 앞 타이어는 보수적으로 점검한다면 곧 교체시기라고도 판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정이 든 녀석을 교체하기로 한다.
새롭게 들인 녀석은 위의 결정적 교체사유로, 타이어가 최우선 점검의 대상이 되었다. 결과 의도하지 않은 (핑크)보라돌이가 낙점되었다. 한 달간의 렌트비용이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주인에게는 당연히 동네에서만 타고 멀리 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으니, 조금의 추가적인 할인(Discount) 또한 얻어내었다. 거짓을 싫어하지만, 이것은 전략적인 접근이라고 애써 변명해본다.
흰둥이와 보라돌이를 비교하자면,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라돌이로 교체한 것은 녀석의 장점이 장거리에 좀 더 적합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둘 다 기종은 혼다 클릭이다. 경쟁 기종으로는 야마하 GT가 있는데 최고속력이 더 낮고, 출력이 더 클지는 모르겠는데 진동이 심했다. 동급의 수동으로 가면 혼다의 Wave가 있는데 짐이 있기 때문에 귀찮은 변속은 그냥 잊기로 했다. 만약에 단기간이라도 오토바이를 렌트가 아니라 구입한다고 치면, 아마도 저속 기어를 편하게 쓸 수 있는 수동 바이크를 선택했을 것이다. 다만 내리막에서는 클릭도 컨트롤만 잘하면 편법적으로 엔진(기어) 브레이크를 쓸 수가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흰둥이의 문제가 타이어의 마모였다면, 보라돌이의 문제는 축의 균형이었다. 사고가 한번 났던 모양인지 주행 축이 다소 틀어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진의 상태는 흰둥이보다 좋았다. 브레이크는 좀 더 느슨했지만 신동급에 가까운 타이어의 상태가 제동력을 좀 더 보태주었다. 첫 날을 몰고 반납을 고민했지만, 또 나와 같이 모자란 녀석과 동행을 한다고 하니 그조차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하며, 그저 이 녀석과 함께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래서 매일 중심이 5도 정도 미세하게 좌로 틀어진 녀석을 다시 5도 정도 우로 뉘어서 산길을 탄다. 인간의 적응력 및 조정력은 분명 신이 준 선물이다. 가는 길 말동무는 이제 이 녀석밖에 없기 때문에, 또 실제 가장 고생하는 것이 이 녀석이기 때문에 이름이라도 지어줘야 할까 해서 로시(난테)라고 간단하게 붙여주었다. 로시, 요시! 하면서 달리는 중이다.
로시의 가속과 부드러운 주행, 크게 덥지 않은 날씨에 미풍을 맞으며 초록이 가득한 길을 타다 보니 어느새 정신이 딴 데로 좀 샜나 보다. 지도의 GPS가 산과 산 사이를 한참 맴돌았다. 목적지라고 하는 곳으로 도착하고 보니, 논두렁은 고사하고 내 키보다 큰 옥수수밭만 한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고개를 넘어가나 싶어서 스쿠터를 산악용 바이크처럼 흙길로 옮겨 보았으나 이내 이성이 여기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핸드폰을 잠시 이리저리 돌려보고 (탁탁) 두들겨도 보고하니 내가 언제 여기라고 했냐는 듯이 다시 저 멀리 40분가량을 달려야 한다고 말해준다. 출발에서보다 더 멀어진 도착지에 아주 잠깐 짜증이 났지만, 아무것도 없이 옥수수밭만 펼쳐진 주변의 풍광도 나름 운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벌써 반쯤 흙투성이가 된 로시 녀석을 세워두고 언덕의 정상으로 걸어본다. 큰 의미랄까, 그런 것은 1도 없지만 그저 여기에 왔구나- 라고 생각하니 또 마음이 차분해졌다. 다시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농부는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도 바로 웃음으로 나를 보내주었다.
바로 예정된 길을 떠날까 마음이 고민과 계산을 연속하다가 점점 이성이 그렇게 하기를 촉구하길래, 반쯤 억지로 핸들을 계단식 논이 있다는 곳으로 꺾어버렸다. 마을 사람도 아침부터 오토바이를 몰아 30분을 달릴 정도라면 뭔가 있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먼저 간 세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을 봤다. 서로 눈인사로 작별하며 각자의 길을 달렸다.
길은 나를 몇 개의 작은 마을과 또 이어지는 마을로 인도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상승하더니 이윽고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꽤나 산 안 쪽에 위치한 마을은 길고 완만한 산의 한 면을 이용하여 계단식 농경지를 만들어 놓았다. 주변의 산이 넓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시야가 트여, 과연 주인장 아들이 말한 대로 볼만한 풍경을 선물해주었다.
다만 날이 이 시간 즈음하여 계속 맑았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으므로 어서 비를 피해 제 갈 길을 떠나기로 했다. 오늘의 목표는 매홍손까지 들어가는 것인데, 지도상으로는 쿤얌이라는 마을을 한 번 들르고 가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출발한 지 채 몇 분이 되지 않아 굵은 빗방울이 나를 따라오기 시작해서 잠시 시동을 멈추고 우비를 챙겨 입었다. 이후 30여 분간 비구름의 경계가 집요하게 계속 나의 주행을 따라왔다. 벗어날만하면 따라 잡히고, 또 벗어나려고 달리면 따라오고.
산 능선을 두어 개 넘으니 다시 하늘이 맑게 개었다. 주섬주섬 젖은 우비를 벗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계속 달려본다.
가는 길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도로의 사정도 무난했고, 반복적인 업힐과 다운힐이 조금 지루할 때 즈음에는 소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이름 모를 산의 정상을 지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난데없이 도로가 반쯤 무너져 긴장감을 살려주기도 했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볕이 너무 따가워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즈음 쿤얌에 도착했다. 산악 지대를 통과하느라 챙겨 먹지 못한 점심을 부리나케 먹는다. 마을 어귀에서 찾은 국숫집에서 잠시간 휴식. 새우가 크게 그려진 과자를 발견하고는 콜라와 함께 후식으로 먹어보았는데, 새우의 함량은 0.0001% 정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케팅의 승리랄까- (당했다)
시간도 이미 황혼을 향해 달리고 있고, 쿤얌에서 매홍손에 오르는 산길에서 또 비를 만나면 낭패라고 생각이 되었으므로 단박에 금일의 목표인 매홍손 숙소까지 진행하기로 한다. 아직도 60KM가 넘게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니 괜스레 하루 종일 앉은 엉덩이가 아려왔다.
다행히도 해가 딱 떨어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했다. 산을 넘고, 넘어서, 오르고, 또 올라 이 곳 매홍손까지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어스름한 마을 풍경과 고립감은 금세 나를 매혹시켰다. 숙소에 돌아가면 다시 나오고 싶지가 않을 것 같아, 마을 중심부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를 찾기로 한다. 골목을 몇 번 돌다 보니 아무래도 호숫가가 이 마을의 중심부인 것 같다. 호숫가 바로 옆의 넓은 식당 홀에 혼자 자리해 앉으니 기분이 묘하다. 처음 보는 사장님이 여행자가 익숙한 듯, 웃음과 간단한 응원의 말로 외롭지 않게 인사를 해주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숙소에 도착하니 배터리가 3% 남았다. 산악 지대를 달리다 보니 거의 내비게이션 용도로만 쓰는데도 배터리 소모가 많이 빠르다. 매홍손 숙소는 커다란 목조 건물로 사진에서 본 것과 꼭 같았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목조 건물의 숙소를 선호한다. 개미가 많고 방음이 잘 되지 않는 등 숙박을 위한 편의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특유의 운치가 있다. 걸음마다 삐걱대는 그 소리가 참 좋다.
오늘도 역시 가족이 운영하는 숙소로 주인장의 영어가 유창하다. 정보가 별로 없이 왔는데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약한 도미토리에 침대를 하나 배정받았다. 자그마한 식당이 별관에 마련되어 있어서 내일은 숙소에서 식사를 해결해도 괜찮을 것 같다.
샤워를 하고 위층을 둘러보니 작은 테라스 공간이 있다. 여행자들이 서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분위기라는 것이 상당히 끼고 싶은 자리였지만, 이틀간의 강행군으로 몸이 매우 지친 데다가 샤워를 한 직후라 다시 땀을 내고 싶지 않아 선풍기가 잔잔하게 도는 도미토리 방으로 내려갔다. 괜히 쿨한 척을 잔뜩 담은 인사를 남기고-
매홍손까지의 일정은 예상대로 무탈하게 이루어졌다. 이 곳에서는 조금 머물면서 주변을 여행할 예정이고 고립된 마을에서의 나름의 힐링도 기대하고 있다. 벌써부터 마음에 드는 숙소와 침대 덕에, 모든 것이 정말 순조롭구나 하는 마음으로 만족스럽게 잠에 들었다.
총 주행거리: 212.3KM
숙소 정보: Crossroads House (아고다)
+) 매홍손에 도착. 계획한 일정과 일치. 로컬이 추천한 곳을 구경함.
-) 200KM가 넘게 달린 거야 오늘? 스쿠터로? (미친)
=) 이럴 줄 몰랐어요. (나는 방향만 계산함)
&) 오늘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