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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임스 Jul 17. 2019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여행

Travel with Doing Nothing

- 부제: 물고기 꼬리(Fish’s Tail)를 머리맡에 두고.


여행(旅行)이라는 주제로 타인을 대함에 있어 적극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름 동남아와 인도를 두루 섭렵했다는 여행자의 얄팍한 내적 자부심과는 다르게 뉴 델리(New Delhi)를 넘어선 인도의 최북단 지역과 그 너머의 네팔을 여행할 기회는 내게도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인도라는 나라 자체가 워낙 압도적으로 큰 데다가 주변국을 끼고 여행하려면 비자의 형태를 달리(Multiple)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첫 번째 핑계였고, 네팔을 따로 떼어내어 여행지 삼기에는 주변국으로의 이동이 제한적이라 비용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 두 번째 핑계였다.


쫓길 일정이 없는 이번 여행(2018~2019)에서 미뤘던 숙제를 하나 마무리할 요량으로 나는, 치앙마이의 안정적인 정착생활을 급히 마무리하고 방콕으로 향했다.


항상 결정까지의 고민은 수 일, 길게는 한 달 이상도 걸리지만 일단 마음의 종소리(실제로 들린다)가 울린 이후로는 모든 것이 비정상적일 만큼 빠르게 움직인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로 거주증(居住證)까지 따놓은 태국 생활을 정리하고 네팔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는 대략 5일 정도가 소요되었을 뿐이다.


목표랄 것은 딱히 없었다. 네팔이야 당연히 히말라야의 설산(雪山)이 유명하고, 에베레스트라는 세계 ‘최고’봉이 있다. 그런 나라에 가서 스탬프를 찍고 머물렀다- 라는 여행 부심을 충족하기 위한 무의식의 발로(發露)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새로운 나라와 장소가 궁금하기야 하겠다마는 이번 태국생활은 지난 5-6년의 경험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이고 동시에 만족스러운 호사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수차례나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걸 꼭 가야 하나?’

‘네팔에 평생 안 가고, 그냥 태국을 좀 더 자랑하면 안 돼?’


다행히도 마음에는 아직 순수한 여행자의 불씨가 남았는지 새로운 곳을 경험하고 그 새로움 속에서 배움을 넓히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부연하자면, 해보지 않았거나 이루지 않은 것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아니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인생의 결정은 대체로 도전의식에 이끌리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수렴(收斂)한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의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보기보다는 ‘무엇을 잃을 것인가’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Jon(a.k.a. 우리 형)은 일찍이 이런 삶의 태도에 대하여 충고한 적이 있다. 노친네의 현명함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매 순간 되묻게 된다. 태국에서의 삶을 살피건대 시간을 두고 돌아와도 다시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여정을 결정하고 실천함에 있어 후회는 없었다.


설렘을 안고 저가 항공의 협소한 좌석에 실려 순식간에 네팔로 날아갔다. 소요시간은 3시간 반 정도로 다리와 허리가 조금 저려올 때 즈음, 기장이 착륙을 알리는 방송으로 작은 해방감을 주었다. 비행 도중에 혹시라도 설산이 보이지 않을지 비행기 꼬리 부분의 창문 근처를 서성였으나 아쉽게도 운은 없었다. 비행 대비 사고건수, 즉 안전도가 전 세계 최하위였던 항공사 치고는 무난한 착륙이었다.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이내 침착함 내지 쿨함이라는 외투를 챙겨 입었다.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Kathmandu)에 성공적으로 입성-


카트만두의 트리부반(Tribhuvan) 공항에서 $40(USD)을 지불하고 30일짜리 비자를 받았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과 나를 포함한 몇몇의 동양인들은 생소함에 다소 우왕좌왕했지만 이내 입국소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한 시간 가량 줄을 선 뒤, 하나둘씩 비자가 붙은 여권을 챙겨 입국을 완료했다. 공항의 환율이 시내보다 더 좋다는 정보가 있어 상당량의 달러를 미리 환전해 안쪽 셔츠 주머니에 꼭 챙겨 넣었다. 처음이라는 설렘보다는 미지의 환경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더 컸던 탓인지, 인터넷을 위한 심(Sim) 카드를 구입하면서도 세 차례나 거듭 가격을 묻고 내용을 확인했다. 초행(初行) 여행객의 집요함이 예삿일이라는 듯이, 직원은 빠른 손과 무심한 태도로 휴대폰을 세팅한 뒤 다시 돌려주었다.


인도인들에 대한 기억을 조금 보정하여 적용하면, 네팔에서도 크게 어설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공항에서부터 손쉽게 깨어졌다. 택시를 타고 싶지 않아서 묻고 또 물어서 배낭을 멘 채 도보로 공항을 벗어나 근 한 시간 가량을 고집을 부리며 버스를 찾았지만 사람들에게 열 번을 물으면 열 번의 답이 다 달랐다. 신기할 지경이었다.


결국 여행자들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공항으로 다시 돌아와 '그것 보라'는 듯이 흘겨보는 택시 조합원들 사이를 비집고 선불료(Prepaid)를 내고서야 본인의 키보다도 한참이나 작은 택시를 잡아타고 여행자들의 거리가 있는 타멜(Thamel)로 향했다.


나처럼 아날로그(Analog)를 지향하는 여행객조차도 이제는 여행의 상당 부분이 기술의 발전으로 매우 스마트(Smart)해졌기 때문에 일일이 호텔을 방문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이, 타멜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식당에 앉아 간단히 요기를 하며 어플(App)을 통해 숙소를 정했다. 예전 같으면 해가 지기 전에 안전하고 경제적인 숙소를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므로 이런 여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서야 오기는 했지만, 사실 카트만두는 멋진 그 이름만큼 많은 기대를 한 도시였다. 전설과 신앙, 자연과 사람 그리고 수많은 여행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세계(異世界)를 형성하고 있을 법 한 곳이었다. 지리를 잘 몰랐으므로 카트만두에만 도착하면 사방으로 설산과 단숨에 폐부(肺腑)를 차갑게 식힐만한 신선한 공기가 나를 맞이할 줄로만 알았다.


상상과 다른 현실감은 나에게 에누리 없는 실망감을 줬다. 물론 그 실망감이라는 것이 나의 무지와 무분별한 기대 덕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자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자조(自嘲)가 컸다. 고작 이걸 위해서 그 평온했던 태국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온 것인가?


하루, 그리고 이틀이 지나고 차츰 카트만두라는 도시와 지리, 골목과 골목의 상점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실망감이 너무 섣부른 감정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켠의 불만감도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포카라(Pokhara)로 떠나기로 했다. 산(山)을 좋아하는 까닭에 특별히 연고도 없는 산악인들에 동경과 동질감을 가지고 읽었던 각종 산악인들과 모험에 대한 썰(說), 이를 바탕으로 그렸던 상상 속의 마을은 카트만두가 아니라 포카라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꼬박 네팔행 항공권과 숙박비 이상이 소요된 것이다.


10시간가량 산악의 커브(Curves)와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일정은 가격에 상관없이 (상대적으로나마) 가장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옵션으로의 선택을 이끌었다. 자가담바(Jagadamba)의 버스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로컬버스보다 8~10배 가까이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지만, 멀미가 심한 나로서는 (거의 유일하고) 현명한 선택지였다.


친절한 승무원의 안내를 따라 탑승한 3열의 VIP버스는 좁디좁은 산악의 험로(險路)를 마치 무력으로 돌파하듯이 거침없이 달렸다. 긴장된 마음에 탑승과 동시에 눈을 감았으나,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격렬하게 요동치는 차체(車體)에 반강제적으로 눈이 뜨이고 다시 억지로 감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돌려 차장 밖으로 시선을 내면 이따금씩 지금 여기가 아니면 볼 수 없을 법한 경치가 버스의 좌우로 펼쳐졌다. 그러나 역시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면 멀미도 함께 찾아온다는 사실이 나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였다. 그나마 화장실이 차량 내에 있다는 사실이 내 육체와 감정의 고행길 와중에 최소한의 안정감을 주었다.


마침내 포카라에 이르니 큰 구토감 한번 없이 잘 도착했다는 행복감과는 다르게, 추적하게 내리는 가랑비가 무심하게 나를 맞이했다. 카트만두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터미널을 혼자 벗어났다가 결국 다시 터미널로 돌아와 택시를 잡고, 시내로 들어가, 식당과 카페를 찾아 잠시간의 여유를 찾은 뒤, 숙소를 검색하여 짐을 풀었다. 일련의 과정에 업데이트나 발전이 없어도 너무 없어 신기할 정도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관성은 인간에겐 피할 수 없는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불멸의 숙소(Immortal Inn)라니. 요란하지도 않았지만 쉽게 멈추지도 않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지친 몸과 배낭을 침대 위에 던졌다. 포카라에 온 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천장을 보는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 미소를 냈다.


3박 정도를 불멸의 숙소에서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한 달 정도 지낼 곳을 찾았다. 카트만두의 혼잡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포카라 역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드나들거나 장기로 체류(滯留)하면서 마을에서 지내기 때문에 메인 거리(Street)로 나가면 곧바로 외국인을 마주하게 된다. 특별하고자 유난을 떠는 나이는 한참이나 지났건만, 꽤나 길고 깊은 동선을 나름 이동했다고 생각하니 그 보상으로 공간적 평온함을 제공받기를 원했다. 현지인들과는 좀 더 많이 만나고 여행자들과는 조금 덜 부대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지런히 다닌 덕에, 꼭 마음에 드는 공간과 위치에 있는 숙소를 좋은 가격으로 흥정을 마쳤다. 마을의 중심부와는 약간 거리(Distance)가 있었으나 하릴없는 이 곳에서 그 정도의 걸음은 매일의 스트레칭 정도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숙소에는 작은 정원이 있어 출입시에 가벼운 힐링감을 줬다. 숙소는 사실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는데 숙소의 주인장에게는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공간 우수성에 기인한 가격 정책이 투숙자를 모객(募客)함에 있어 어려움을 주는 것 같았다. 때문에 5층이나 되는 건물의 거의 모든 방이 공실(空室)이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고독과 고립을 통한 카타르시스(Katharsis)를 꽤나 자주 느끼는 관심병의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포카라, 네팔에서의 여행(혹은 머무름)을 시작했다. 방 침대의 머리맡에 커다란 녹색 나무 창틀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히말라얀(Himalayan) 산맥의 방향을 향했다. 네팔에 오기 전부터 가장 원하고 또 바랬던 마차푸차레(Machapuchare)의 정상인 피쉬 테일; 물고기의 꼬리(Fish's Tail)와 같은 생김새를 닮았다고 하여; 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그간의 피로감 때문인 탓도 있고, 날씨 자체가 계속 비가 내렸기 때문에 머리맡에 마차푸차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쉬운 여행자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어느 날 비구름이 거짓말처럼 단숨에 사라졌다. 그 날 아침, 여느 날처럼 방 한 구석에 돌돌 말아놓은 요가매트를 다시 펼치던 중 커다란 창틀 너머로 아득하게 하지만 너무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내뿜는 마차푸차레가 보였다. 내가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지 주인장 가족이 숙소 건너편에 위치한 집에서부터 놀라서 달려올 정도였다.


대단했다. 그저 오롯하게 마차푸차레의 존재감인지, 내 열망이 환상을 계속 덧붙여 왔는지 온전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정말이지 대단했다. 최초의 발견 이후로도 계속 매일매일 대단했다. 무엇을 위해 이 곳까지 흘러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앞으로의 계획이나 생각 따위는 고개를 들어 마차푸차레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모두 금방 휘발되듯이 날아갔다. 특정하게 종교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신(神)의 존재에 대해 물음 하는 일이 잦은 사람으로서는 이 환상적인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연신 절대자에 대한 감탄과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날들에도 매일의 일과는 단조롭지만 반복되었다. (피하고 싶은) 단순한 관성은 아니었다. 단조로움 안에 풍요가 깃들어 있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완벽한 작품을 보고 또 보고, 그것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간간히 여행자들을 만났다. 피하고자 해도 모두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본디 스스로도 소통하기를 좋아하는 고독한 자(者)라; 이기심과 아이러니의 극치라고도 종종 생각함; 만나서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이 트레킹(Trekking)을 권했다. 이미 다녀온 자와 떠나려는 자 모두 길에서 담아온 멋진 사진들과 기대감을 공유하며 함께 하길 원했다. 나 역시 네팔로 향하면서 목표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트레킹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이미 중량급 패딩(Goose Down)을 배낭을 넣어 두고 있었다.


서두를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컨디션이 조금 올라와야 한다는 전제(前提)로 히말라얀 트레킹을 미루었다. 마차푸차레를 보고서는 저 명작(名作)을 더 가까이 눈 앞에 두고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하루 종일 차분하고 조용한 숙소에서 매일 아침 기상 인사를 하듯 옥상에 올라 마차푸차레를 반 시간 가량 지켜보는 일이 그런 설렘을 평온하게 달래주었다. 내려오면 호텔 스태프의 숙련된 손길과 정성이 느껴지는 아침이 매번 나를 미소 짓게 했다. 복도에 별도로 마련된 테라스에 앉아 초록의 정원을 보거나 고요한 호텔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매트(Mat)를 깔고 요가를 하는 일이 몸과 마음 모두에 안정감을 줬다.


편안한 차림으로 뒷짐을 진 채 마을을 거니는 일은, 대중없이 눈에 보이는 골목에서 또 골목으로 스스로 헤매는 과정은 재미가 있었다. 좋아하는 카페는 포카라에서 가장 비싼 곳이었지만 하루를 거르지 않고 책을 읽으러 나갔다. 소비는 언제나 일정 이상의 쾌락을 제공한다. 운이 좋은 날에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원체 술을 많이 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히말라야를 목전(目前)에 두고 마시는 맥주나 창(한국의 막걸리와 비슷함)은 한 두 모금 만으로도 청량함이 가득했다.


행복의 역치가 극단적으로 낮아져 단조로운 삶으로도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트레킹을 나서는 일이 불필요한 혹사(酷使)로 느껴졌다. 안주(安住)하는 일이 이토록 행복한 일이었던가-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지난 여행과 삶의 몇몇 페이지들이 대비되어 머릿속을 스쳐갔다. 트레킹을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한 달 동안 누구보다도 마차푸차레를 많이 들여다봤다고 생각한다. 이따금씩 여행자들을 만날 때면 나도 인간인지라, 항상 같은 요청을 드렸다.


"마차푸차레 사진 좀 볼 수 있을까요?"


선명한 고화질의 사진이 부럽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이는 사진 실력에 날씨라는 운까지 겹쳐 실로 근사한 사진을 보여준 적도 있다. 다만, 오늘의 나의 선택이 트레킹에 나서지 않음이 부러운 적도 단 한 번이 없었다. 순수한 자기만족의 상태에 이르러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만족감을 넘어 귀여운 정도의 자부심도 느껴졌다.


행복했다. 물론 마차푸차레라는 성산(聖山)이 준 천혜(天惠)의 환경적 요인을 두고서, 행복은 마음의 문제라고 정리하기엔 너무도 진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마음에 이르기까지의 무수하고 소소한 일상, 그리고 그 반복은 실재적(實在的)인 내용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행복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경험에 이렇게 길고 긴 기록을 남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행복할 수는 있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여행, 2019 @dalaij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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