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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고3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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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May 31. 2023

궁금하죠 고3엄마

다들 어디서 뭐 하세요.

 고백하자면 그동안 5번의 일 제안이 있었고. 처음엔 거절을 하다가. 두 번짼가 세 번째에는 한번 해볼까요.. 를 시전 하며 일을 다시 나가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고3이라는 존재는 아침 일찍 나가서 오후 4시 반쯤 저녁을 먹으러 들어올 때나 맞이하는 일 외에 별로 해 줄일이 없는 데다가. 이 밥을 정성스럽게 차려놔 봤자. 그날 아이의 입맛이 내가 차린 밥과 어긋나게 되면 차려놓은 정성은 무시된 채로 쿠팡이츠나 배달의민족 앱을 이용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도대체 왜 집안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문득문득 오는 데다가.

 이 고3이라는 존재는 한 번씩 극단의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를 속으로-우리 딸은 속으로 삼키다가 부들부들 떨며 울 때가 있다-삼키며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는 경우가 가끔 있어 그럴 때면 그 극단의 불안감이나 스트레스가 내게로 그대로 전이가 되어 나도 같이 머리가 다 빠질 것 같은 우울감에 허우적거렸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싶을 때마다 일 제안이 들어오는 데 난들 어쩌겠는가.

 그래. 일을 다시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하면서 스멀스멀 기어나가고 싶지 않겠는가. (공감해줘어)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딱 한번 "해볼까요.." 했던 그 일은 나가리가 되었고. 나는 스스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이가 멘털이 약하니 내가 다잡아줘야 해. 내가 엄마야. 정신 차려.


 그리하여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 생각해 낸 게 자격증이었는데. 언젠가 일 연결해 주시던 부장님이 꼭 따보라던 CSTS가 생각나서 덥석 책을 사고 시험신청을 해버렸다.

 신청을 하면 무얼 하나. 이래저래 미루다 시험비용이 아까워서 책을 펼쳐 줄을 그어가며 읽어봤는데. 이게 문제를 풀어보면 머리가 하얗게 변해있어 다시 돌아가 펼쳐보면. 분명 내가 줄을 그었는데 생각이 안 나..

 다시 형광펜을 칠해놓고 총 모의고사를 풀다가 또 생각이 안 나서 돌아가면-내가 줄도 긋도 형광펜도 칠했는데 그 문장이 낯설어..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니 책을 한 4번 정도 읽고 난 후에야 목차가 외워지고 머리에 내용이 남았다.

 그렇게 책 한 권을 4번이나 읽으며 공부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수석을 하겠다며 호기롭게 집을 나섰는데. 막상 시험장에서 아리까리 문제를 체크해 보니 족히 10개는 되는 것 같아서 좀 허망했다.

 그래도 시험이라고 끝나는 날은 치킨도 시켜 먹으며 자축을 했는데.

 이게 그다음 날이 되니 이제 또 뭘 해야 하나 생각이 들어 시험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다른 자격증을 신청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ISTQB라는 시험인데 이건 국제자격증이다. 위에 저 시험과 목차가 비슷하니 조금만 더 해보자 싶어 시험을 신청했는데 이건 시험 보는 비용만 17만 원이 넘어 저절로 열심히 하게 될 줄 알았으나. 역시나 이걸 또 왜 신청했나 돈만 날리게 생겼군 후회를 하며 꾸역꾸역 공부해서 다행히 시험은 패스를 했다.

 첫 번째 시험은 상위 8프로 성적이 나왔고, 두 번째 시험은 진짜 떨어질 줄만 알았건만 다행히 패스를 해서 돈을 버리진 않게 되었다. 나름 성적이 잘 나와서 딸아이에게 자랑을 했더니. 엄마 2등급이네 한다.


 자. 시험 다 끝났어. 그럼 다음은 또 뭘 하지.

 시험 그거 봤다고 공부하는 거는 곰방 지긋지긋해져서 뭔가를 배워보자 싶어 문화센터를 알아봤다.

 우리 동네 문화센터는 수업이 100개도 넘는 것 같은데 나는 그중에 샌드위치와 샐러드, 엑셀과 파워포인트 수업을 신청했다.

 요리에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닌데 아이와 신랑이 샌드위치를 좋아라 해서 좀 더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고자 신청을 한 거였고. 12주 동안 매번 새로운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배우다 보면 뭔가 한두 가지 남는 건 있겠지 싶은 마음이었는데 역시나 집에 와서 재현해 보는 일은 전혀 없었고.

 

 한두 개씩 재료(주로 소스재료)를 사다 보니 뜬금없이 감바스와 오일파스타를 실컷 해 먹게 되었다. 해산물 샐러드의 재료는 모두 감바스가 되고, 올리브오일로 만들려던 샐러드소스는 마늘 갈아 넣다가 그냥 오일파스타로 넘어가 버린 것.


 엑셀은 일을 하면서 항상 쪽팔렸던 부분이라 실무에 좀 도움이 될까 싶어 신청을 했다.

 의외로 엑셀수업이 무척 재밌게 느껴져 그쪽으로 흥미가 꽂히게 되었는데 수업이 진행될수록 같이 듣는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분들이 곡소리를 내시다가 3분의 2 정도가 지났을 때는 모두 사라지시고 말았다. 문화센터 기초반이긴 하지만 제법 엑셀다운 기법이 나오자 이걸 굳이 왜 골치 아프게 배워야 하나 생각이 드셨을 것 같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좀 젊은 사람들인데 중간쯤의 나도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다.

 엑셀은 알수록 흥미로워.



 

 이렇게 2월은 아이와 방학을 함께 하고. 3월 개학하면서 나는 자격증 한 개. 4월에 자격증 한 개. 다시 4월부터 6월까지 문화센터 수업을 월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만의 스케줄이 없이 오로지 아이만 생각하며 지내자고 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탄식이 올라오며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스트레스를 분산시켜야 하고 나도 나름 즐겁게 삶을 살아야 아이에게 긍정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

 안 하던 살림도 사부작거리며 해 보니. 눈에 보이는 게 모두 할 일이라 종종거리며 하루 종일 집안을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빨래도 건조기에 한번 햇빛에 한번.

 끼니마다 야채 많이 먹이겠다고 이것저것 썰어서 볶고 끓이다 보면 아니 내가 감자호박을 이렇게 자주 사들인 적이 있었나 신기할 정도로 재료가 줄었다. 간장이나 식용유를 한 달에 두 번 살 때도 있다.

 청소를 일주일에 한 번씩 했었는데 이젠 거의 2-3일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하며 집안 여기저기를 쓸고 닦는다.

 집안에 주로 있으니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게 자꾸 눈에 띈다.

 

 이렇게나 열심히 집안일을 하며 스트레스 없이 잘 버텨보려고 자격증 따고 문화센터 다니는 어미에게 지난주 아이가 성적표를 가져왔다.

 그 하나 잘하는 수학마저도 전에 본 적 없던 점수등수가 나왔길래.

 시험지가 바뀐 거 같아... 카톡을 보냈더니.

 기분 안 좋으니 성적으로 장난치지 마. 답변이 왔다.

 장난이라니. 하도 기가 막혀서 돌려 얘기한 거였는데 내가 너무 애를 안 혼냈나 혼나는 거를 인지를 못하고 장난하지 말라네.

 이 말갈족 같은 고3 소녀는 과연 국어를 못하는구나. 대화가 어려워 얼른 단념을 해버렸다.

 그래도 또 애 기는 죽이지 말자. 부모가 더 실망하면 본인은 또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주눅이 들겠어하며 꾸역꾸역 일어나 돼지고기 듬뿍 넣어 카레도 만들고 인터넷 뒤져서 하얀 오이무침도 해둔다.

 

 고 3 엄마란 여러 생각에 휩싸인다.

 인내. 내 유전자에 대한 한탄. 인내. 성찰. 이해. 노력. 안타까움. 분노. 인내. 희망. 절망. 인내. 인내.


 지지난주 주말엔 -야외에서 졸업사진 찍는다며- 머릴 다듬으러 갔다가 아예 삼각김밥 머리가 되어 돌아와선 1시간을 대성통곡을 해댔었다. 뭔가 눌려왔던 게 한꺼번에 터졌나 보다 좀 달래다가 그냥 두었는데. 그대로 울다 지쳐선 잠이 들었고. 숙제를 못하고. 학원에를 못 갔다.

 숙제를 못해도 학원에는 가야 한다고 애를 얼르고 달래다가 이내 분노가 폭발한 나는 신랑도 본 적 없는 포악한 분노를 표출하며 애한테 소릴 질렀는데 그 와중에 아이는 돌처럼 굳어 말이 없었다. 대꾸도 반응도 없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방에서 한숨 자고 나와 신랑에게 부탁을 했다.

 내가 딸아이를 놓더라도 당신은 아이옆에 끝까지 있어달라. 나는 한 번씩 내가 사람을 키울 역량이 안되는데 새끼를 낳았구나 하는 깊은 탄식이 올라온다고 고백을 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결혼을 할 역량이 안되는데 결혼을 했고. 그저 딸아이의 말대로 나는 혼자 살아도 잘 살았을 거 같은데 연애나 하며 젊은 시절 보내다 나이 들어 편안하게 좋아하는 일이나 하며 여행 다니고 살았을 걸 어쩌자고 어쩌자고... 하고 있음 또 애가 나와서 슬그머니 말을 걸고 배고프다 하니 빈정상해서 찌그러진 맘을 잊고 또 후딱 밥을 차려준다.

 

 내 새끼지만 이쁠 때도 있고 미울 때도 있다.

 내가 유일하게 내 목숨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존재이지만. (신랑에게는 목숨까지는 좀 그렇죠.)

 이게 뭔가 너무 밀접해. 자식은 너무 밀접해서 나와 떨어뜨려 놓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매우 힘든 존재다.

 나처럼 지극히 개인주의 성향의 사람이 자식을 키우는 게 더 힘든 게 아닐까 가끔 생각을 해보는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해봤자 이미 낳아 놨으니 끝까지 책임져야지 어쩌겠는가.


 요즘의 새로운 낙은 책 읽기인데 간만에 돌아온 패턴이라 반갑다.

 책을 이것저것 읽으니 생각이 많아지고 이런저런 관심사가 생기는 거 같다. 가고 싶은 장소도 생기고 새로 배우고 싶은 것들도 생기고.

 아이를 잘 케어하자면 우선 내가 파이팅이 좀 넘쳐야 하고 우선 내가 좀 행복해야 한다.

 

 이제 내일이 6모(6월 모의고사)인데 잔뜩 긴장해 있는 아이를 잘 다독여야겠다.

 재수생이 들어오는 첫모의고사라며 걱정을 잔뜩 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인지 오후에 먹은 불닭복음면 때문에 속이 아프단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를 좀 하면 맘이 한결 가벼울 텐데 어찌나 걱정은 많으시고 엉덩이 붙이는 시간은 희박한지. 내가 자격증 딴다고 하루 2시간씩 공부를 했었는데 고3아이보다 내가 더 열심히 공부하는 기분이었다면 말 다했지.


 괜찮아. 나를 다독이고 아이를 다독여 본다.

 겁 많은 것도 나 닮은 거고. 멘털 약한 것도 나 닮은 거고.

 지금은 저래도 나중에 사회생활하고 깨지다 보면 또 엄마처럼 건방진 똥덩어리라고 불리며 싸가지 키울 날이 있겠지.

 

 전국의 고3 학생들과 그들의 엄마들.

 모두 화이팅.

 화이팅이 참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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