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너무 따사로워서 가을바람이 봄바람처럼 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노는 사이, 나는 벤치에서 슬쩍 잠들었다. 평소라면 밖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마스크를 써서 뻔뻔해진 건지 밀려오는 잠에 쉬이 항복했다. 부쩍 속이 시끄러운 날들이라 수면부족이 쌓여 너무 피곤했다. 쨍하던 해가 잠시 숨어 자리가 그늘지면 슬쩍 눈이 뜨였다. 맑지만 서늘하고 해는 들락거리는 하늘 아래 온전치 않은 낮잠. 이틀 밤을 새워도 좀 눈 잠깐 붙이면 또 쌩쌩하게 집을 나서던 언젠가에 비해 지금의 내게는 체력이랄 것도 없다.
국가 건강검진을 깜빡하고 있다가 11월을 맞이한다. 어디 파묻혀 있던 우편물을 발견하고 이제야 제대로 읽어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딱히 의미 없게 느껴지던 기본 검사를 받던 지난날들이었건만 어느덧 위암에 유방암 검진까지 추가되는 나이에 진입했구나. 항목이 여럿이라 어디로 갈까 지도를 뒤적이다 어느덧 삶의 진짜 한가운데로 내달리는 내 나이에 현타가 왔다. 요즘 작은 아이는 유치원에서 <캔디>의 안무를 연습하고 있다. 내가 소녀일 때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를 나의 아이가 흥얼거리며 춤추는 모습에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그 시절이 이렇게나 흐릿하게 멀어졌던가.
"엄마, 캔디 노래 부를 수 있어요?"
"응, 부를 수 있지. (실은 랩도 해. 춤도 알 걸?)"
"진짜요?"
"사실 엄마가 단지 널 사랑해 부분 부르는 사람을 좋아했었어."
"으잉?"
대뜸 소싯적 팬심을 털어놓는 내 말에 아이는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당시 해외에 살기도 했고 대단한 팬질은 못해봤지만, 나름 팬이었던 그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고등학교 때 하이힐을 처음 신어보았고 대학 때는 머리털이 개털이 되도록 염색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노메이크업과 까만 머리카락을 뚫고 나오는 너무 예쁜 젊음이 보인다.
방송을 제대로 안 봤는데 인스타그램만 돌아도 다 본 것 같은 환승연애 시즌2에는 20대만 존재한다. 아무래도 29세가 커트라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만 봐도 귀엽고 눈물 흘리는 모습에는 오구오구 하며 뭉클하다. 아이돌 열애설을 보면 팬들은 시끌시끌하지만 난 그저 잘 어울리고 예뻐 보인다.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까까머리 군인도 다 귀여워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때의 어른들도 어린 나를 볼 때 그런 심정이었을까? 요즘 난 세상 모두가 아기 같아 보이는 할미가 된 느낌이다.
남편과 아이들은 한참 동안 아웃렛 놀이터를 돌며 숨바꼭질을 했다. 셋이 땀범벅이 되어 벤치를 향해오더니 포켓몬GO 게임에 심취했다.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세 남자는 알지도 못하는 골목을 걸으며 몬스터볼을 던져대고 포켓몬을 잡았다. 그걸 따라다니다 보면 게임과 친하지 않은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아주 혼란스럽지만, 포켓몬GO와 함께라면 2만 보도 거뜬한 꼬맹이들의 운동량을 위해 그 걸음에 동참했다. 그리 열정적으로 놀고 온 다음 날, 작은 아이는 열감기를 앓기 시작했다. 은행 앱의 유치원비 출금 알림이 무색하리만치 지난 한 달간 유치원에 간 날보다 안 간 날이 더 많다.
"약기운이 드나 봐요. 유치원 갔어도 됐겠는데요?"
"안 돼. 아직 못 가. 좀 잘까?"
"아뇨. 놀아야 돼요."
"아플 땐 푹 쉬어야 해."
"노는 게 쉬는 거죠."
"와, 역시 젊은 게 좋네!"
"?!"
해열제 한번 먹었다고 다시 날아다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역시 젊은 게 좋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너희 엄마는 노는 것도 일이 됐나 보다. 나는 내 나이가 제일 좋다고 생각해온 사람이지만, 요즘은 나이가 들수록 삶의 난도가 올라감에 치임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이 좀 달라졌다. 긴 비행을 하고 비행기를 나서도, 과제에 치여 밤을 새우고 나와도, 연애가 좀 고달픈 날에도, 세수 한 방이면 제법 뽀송해지는 젊음이 그립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부디 오늘의 그 젊음들이 꾸준히 싱그럽고 아름답기를. 나의 아이들의 젊은 날들도 그러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