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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Oct 29. 2022

사과 한개의 무게

책의 몸을 즐기는 법


사람마다 기분 좋은 무게가 있을 것이다. ‘이 크기라면 이 정도 무거움이 좋아’라는 나름의 내적 저울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가벼우면 편안하고 친밀한 반면, 무거우면 신뢰감, 고급짐, 풍요의 느낌을 받는다. 디자이너에게도 무게란 의도적인 개입이 필요한 요소다. 아이폰도 가볍게 만들 충분한 기술이 있지만 의도적으로 다소 무겁게 만든다고 들었다. 전자제품의 가격과 고급스러움은 무게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나는 ‘크기에 비해 가벼운 편인걸’ 정도의 무게를 선호한다. 책의 경우에 230그램 내외로, 중간 크기의 사과 한 개 무게와 비슷하다. 내가 쓰고 있는 스마트 폰은 215그램이니, 책 하나와 맞먹는다. 고기가 230그램이면 혼자 배부르게 먹을 양이고, 200미리 우유는 200그램이다. 주부 9단은 마트에서 감자 100그램이 399원이라면 어느 정도의 감자를 담아야 오천 원어치가 될지 가늠할 수 있다.   


 독립 출판물 중에 내가 좋아하는 무게의 책이 많다. 대개 사이즈가 아담하고 한 손에 쏙 들어온다. 여성의 핸드백에도 무리 없이 동반 가능하며 가볍고 상냥하다. 외출 시 가방에 넣을까 말까 하는 망설임 없이 책을 데리고 나갈 수 있다. 더불어 느슨한 내용과 관대한 여백은 마음의 무게도 보태지 않는다. 책은 작을수록 친밀하게 느껴진다. 얼굴에 바짝 가져가 읽어도 팔이 아프지 않고 읽다가 겨드랑이에 끼고 다닐 수도 있다. 더욱이 평소 짐이 많고 가방이 무거운 사람에게 무게란 굉장히 예민한 부분이다. 


나의 경우도 유목민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집을 떠날 때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온갖 것을 행낭에 꾸리게 되니 무게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꾸역꾸역 책을 챙겨 넣어야 안심이 된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는데도 그렇다. 길을 가다 넘어졌을 때 내 가방에서 멋진 책하나 정도는 튀어나와 주면 좋겠다 싶은지도 모른다. 샤넬 지갑보다 책 한 권은 나와 함께 뒹굴어야 품위가 유지되지 않겠는가. 


이럴 때 둘의 기능은 같다. 그것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읽지도 못하면서 넣어다니는 책은 일종의 패션아이템이다. 중년이 넘어서니 신체가 노쇠해서 내 한 몸도 버거우니 작고 아담한 사과 한 개 무게의 책이라면 품위 유지용으로 제격이다. 혼자 커피를 마실 때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 '지성미+1' 이 획득되니 궁상스러움도 피할 수 있다.


대형 서점에서도 작고 아담하며 가벼운 책이 많아졌다. 소박하고 작은 사이즈는 일인가구에게 각광받는 크기이다. 이케아의 조립 가능한 작고 운반이 쉬운 가구들은 이런 트렌드에 잘 맞다. 20대가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면서 가벼운 것들이 인기가 많아졌다. 라탄이나 등나무 가구, 스툴이나 밝은 색의 가구들은 가벼움을 표방한다. 그러니 작은 책들이 잘 팔릴 수밖에 없다. 


‘책 읽는 고양이 출판사’나 ‘유유 출판사’의 서적은 가볍고 아담하다. 표지는 밝고 유쾌하며 작은 공간에 맞춤인 사이즈라 북페어에 가면 이런 출판사의 부스에는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나도 발랄한 20대 틈에서 이 책 저 책 신이 나서 고르다 보면 늘 예산을 넘는다. 마음만큼은 진심 20대다. 근데 돌아와야 할 거리가 먼 타지역에서 책을 사는 것은 참, 아무리 가벼워도 노쇠한 몸에는 미련한 짓이다. 마음에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저는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는 것과 줄자로 길이 재는 것을 좋아하는데, 혹 여러분 중에도 그런 취미가 있으신 분이 있지 않으신가요? 사물을 수치로 전환시키면 뭔가 기분이 좋아요. 이런 측정의 심리는 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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