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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스테리안 Jul 30. 2023

[오픈 세미나] 자습소 - 트랜스로컬

공공예술프로젝트 연구 : 고정주소없음

히스테리안의 3년 간의 연구 궤적을 볼 수 있는 마인드맵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생각과 질문은 어떤 식으로 상호 교류할 수 있을까요?  그런 만남은 아카데믹한 발제나 정확한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발표의 형식을 넘어, 때로는 비약과 오독과 무모한 제안을 거쳐, 무엇을 생산하게 될까요? 그에 대한 기록은 연구서나 전시 도록의 형태에 더해,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을까요?


히스테리안은 대안적 삶과 예술의 관계성을 연구하고 텍스트를 쌓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21년부터 시작된 히스테리안의 연구 프로젝트, 전시 ‘오드라데크’는 해를 거쳐 올겨울 종장에 다다를 예정입니다. 삼 년간 축적한 자료와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한 개념들이 서로 교차하는 이 여정에는 외부의 관심 어린 눈에 자못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출판과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연구 맥락이 투명하게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아쉬웠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한 가지 시도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 내용을 공개하고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 자리를 '오픈 세미나 - 자습소'라고 명칭 합니다. 각자의 공부가 도중에 만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기존의 학문적 교류의 형식을 한 발짝씩 넘어서는 색다른 매개를 시도해보려 합니다.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다가 영 안 풀릴 때잠깐 친구랑 수다를 나누러 산책 나올 때처럼 말입니다.


'자습소’는 그 현장을 확장하여 만든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주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 교호적인 의미와 재미가 생성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픈 세미나 - 자습소'는 4월부터 10월까지 격월로 4회에 걸쳐 문을 엽니다. 4월과 6월의 자리는 리서치 된 자료를 중심으로 아이디어를공유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8월과 10월에는 직전 자습소에서 발생한 대화의 씨앗을 거두어 논의를 한 발 더 내디뎌보는시도를 할 예정입니다. 참여하시는 분들은 자유롭게 들어와 자료를 챙겨가고, 이야기를 듣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실 수있습니다.


히스테리안 자습소 - 이용 방법

자습소는 올해 4월, 6월, 8월, 그리고 10월에 열립니다. 누구든 자습소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온라인(Zoom)과 오프라인으로 동시에 진행되니, 편한 쪽으로 오세요. 히스테리안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hysterian.public/) 을 통해 일정 및 참여 방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스테리안의 연구팀이 먼저 그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이곳 노션의 [자습서](https://www.notion.so/3249deb9812242ddb6673124a1a2454c?pvs=21) 페이지와 함께 공개합니다. 때로는 옆에, 건너, 또는 멀리 있는 연구자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기도 할 거예요. 그리고 모두가 무질서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아 봅시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도 불쑥, 해주세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라면 더 좋습니다. 설익은 생각들을 주고 받는 것이 이 공간의 목적이니까요.

이 페이지에 있는 자료들을 즐겁게 보시고,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댓글 기능을 사용해 주저없이 남겨주세요. 이곳의 모든 자료는 출처 표기와 함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외부 필자 원고의 경우 작가의 추가적인 동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원고 내부에 유의점을 표기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자습소 신청:  https://forms.gle/XRjvWYRoQJcjA2wF7 

히스테리안 고정주소없음 자습서 2호

일시: 2023년 6월 15일 목요일 19:00~21:30

진행: 히스테리안 연구자 (강병우, 민주)

참여: 권수빈 (안동대 연구교수), 최희진(솔방울커먼즈, 도시연구자)

자료함: https://www.notion.so/hysterianpublicontheroad2/2-8b1d7db6d1b34b3d8b3abc1611e9182c?pvs=4 

참여형태: 온/오프라인

발행처: 히스테리안출판사


아래 글은 히스테리안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 (2022-2023)의 일환으로 진행된 «자습소 2호: 연결의 방법론, 출몰»(2023년 6월 15일)에서 논의된 이야기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리뷰 에세이 입니다.


연구 소회 1.

민주 | 상황 속에서 길 잃기


출몰의 의미를 발굴하기 위해 두 번의 자습소가 열렸습니다. 출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토막민과 애버리진의 사례를 통해 질문한 것이 첫 자습소의 주제였습니다. 1호 토막민과 원주민

이번 자습소는 출몰은 어떻게 개입하는가를 묻는 자리였습니다. 2호 로컬과 트랜스로컬



어떻게 개입하는가?


‘개입’이란 예술가와 연구자가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개입하는가 하는 물음은 관계 또는 출몰이라는 관념적인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작용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물음이지요. 출몰은 오드라데크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드라데크는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그를 따라 우리도 오드라데크의 자리에 출몰해 보자, 이것이 출몰의 계획입니다. 출몰은 타자와 만나기 위해 그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텅 빈 채로 놓아두는 모든 시도를 의미합니다.


오드라데크라는 타자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

남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을 생성한 후 그 지식을 소유하는 일에서 시작하는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를 우리는 과연 상상할 수 있는가?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는 그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데려다 놓는 일,

즉 출몰에 앞서, 우리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비워져 있어야 하는가?

출몰을 어떤 행위로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내일 그걸 시도해 볼 수 있는가?


권수빈은 출몰이란 상황 속에 나를 데려다 놓는 일이라고 말한다.


연구자 권수빈에 따르면, 출몰자는 상황과 자신의 몸을 한 데 놓음으로써 ‘상황적 지식들’을 만들어 내는 자입니다. 상황적 지식들이란 철학자 도나 헤러웨이(Donna Haraway, 1944-현재)가 제시한 개념으로, 지식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우리의 몸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상황적 지식들을 특징짓는 이 체현된 객관성은 전적으로 보편적인 지식이나 전적으로 주관적인 의견의 이분법과는 구별됩니다. 지식은 항상 상황과 결부되기에 특정한 객관성을 지니는 동시에, 연구자의 몸이라는 제한된 조건을 통해 체현되는 것이기에 절대적인 보편성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출몰자로서 자신을 강물 속에 댄 족대로 가시화한 기획자 김은성의 상상이 권수빈의 사유에서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활용됩니다.

족대질로 환유될 수 있는 앎이란 어떤 것인가? 족대질로 건져 올린 것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날 것의 현장에만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이 기획, 연구, 관찰, 기록, 디자인 어느 것에 있든 우리는 자신만의 족대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가 앎의 행위다. — 권수빈 | 족대와 트랜스로컬 ‘1. 족대와 상황적 지식들’ 중에서

상황적 지식들을 낳는 상황이란 더 이상 ‘인간 혹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 아니라, ‘강에 잠긴 족대’ 이자 ‘족대를 품은 강’입니다. 상황 속에 놓임으로써 인간의 몸은 지식을 탄생시키는 조건이자 장소가 됩니다. 출몰은 상황 속에 있는 몸을 통해 지식들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상황 속으로 몸을 가져다 놓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최희진의 길 찾기는 길 잃기에서 이루어진다.


연구자 최희진은 현장을 조사하다가 (일부러) 길을 잃습니다.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단순히 길 찾기에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기겠다는 무책임하거나 순진한 시도도 아닙니다. 그는 작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1961-현재)의 말을 빌려, 길 잃기란 더 커진 세상에 당도하는 하나의 방법론임을 강조합니다.

“길 잃은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발견되는 법”이다(솔닛, 2017). 길 잃기는 자신의 정체성 문제와 더불어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다. 또한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등의 방향이 놓인 길 위에 길을 잃는 것은 자신과 마주한 환경, 사물, 사람과의 관계를 때로 낯설게 만든다. 한편 길을 잃지 않는다면 자신이 아는 세상에만 붙들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최희진 | 길 잃기 현장연구(A Field Work To Getting Lost) 중에서

최희진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출몰자의 출몰은 일부러 길을 잃어버리는 데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자는 흥을 깨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종종 길을 잃습니다. 모르는 것에 나를 열어두고, 기존의 지도에는 기입되지 않은 땅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더 커진 세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노드트리는 출몰의 가능성이 상상력과 결단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예술가인 노드트리의 이화영은 출몰이 상상과 결단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현실에서 절단되어 있는 단면들을 감각합니다. 그러한 풍경이 지금 모습 그대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예감은 다른 현실을 상상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술가는 결단을 내립니다, 상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지금의 현실에 개입하기로.


예술가의 출몰은 현실에 자신의 스케치를 덧대어 특정한 감각으로 수용하는 능력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수용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과 개입에 연결하는 결단이 바로 출몰입니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출몰이 시작되는 저 절단면이란 무엇일까요?


천근성에게 그것은 누락된 것들의 자리이다.


예술가 천근성은 주변을 유심히 돌아본다면 가끔 무언가 누락되어 있는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자리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가 부재할 때 만들어지기도 하고, 마땅히 있는 자를 없는 것으로 만드는 제도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빈 자리는 비어있지 않습니다. 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에게 닿았던 빛이 당신의 눈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오드라데크는 때로 빛을 반사시켜 자신을 드러내지만, 때로는 빛을 자신의 몸에 투과시켜 흘려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빈 자리는 투명(透明)하는 것들의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감각하는 일은 일상적인 시각 작용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드라데크와 감각을 통해 조우하는 일은 지성과 애정을 요합니다. 천근성이 누락을 감각하는 서울의 새꿈어린이공원, 그리고 앨리스스프링스의 토드 거리 공원은 노트드리가 ‘절단면’이라고 말한 것의 또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출몰은 누락된 것들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왜 개입하는가?


어떻게 개입하는가의 문제는 어째서 개입하는가의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자습소에 자리한 참여자 김소희는 묻습니다.


왜 출몰하는가?

이로부터 질문이 잇따릅니다.

우리는 왜 개입하려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출몰케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줄기차게 출몰에 골몰하는가? 우리는 왜, 관계와 출몰을 염하는가?

이 물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어질 자습소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연구 소회 2. 강병우

강병우 | 얽히고설킨

윈투족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어느 여름날 모기 한 마리가 내려앉아 마우스를 쥔 제 손등을 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모기가 오른손등을 물었네. 제 손은 언제고 어느 날이든 오른손일 테고, 모기는 그 손을 쫓는 이상 한평생 오른쪽에 갇혀 있는 꼴이 될 겁니다. 안타까운 모기는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만 상상될 뿐인데요. 모기는 제 손등과 연관 해서는 세계의 모서리에 감금될 따름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저는 오른쪽이라고 항상 자신하고 있는 걸까요. 손등보다도 중요한 건 ‘저의’ 손등인데, 주체가 아닌 것으로 객체를 이해할 때 비로소 대감금의  시대가 열립니다. 최희진 연구자는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에서 윈투족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른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윈투족이 강을 따라 올라갈 때 산이 서쪽에 있고 강이 동쪽에 있고 모기가 그의 서쪽 팔을 물었다면, 그가 거꾸로 내려올 때 산은 여전히 서쪽에 있지만 이제 그가 모기 물린 데를 긁으면 동쪽 팔을 긁는 셈이다.”(리베카 솔닛,  김명남, <길 잃기 안내서>, 반비, 2018, 35쪽.)


아메리카 원주민 윈투족은 자기 몸을 재미있게 지칭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놀라운 사유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 (비)웃음은 사유의 한계가 보여준 해학일 테니까요. 몸을 주체 중심으로 바라보는 습관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우주 질서의 기준이 지구가 되는 것만큼이나 균일한 몸을 천문의 중심에 두지요. 그렇기에 저는 늘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쥡니다. 윈투족의 사례를 통해 리베카 솔닛은 고정된 것은 세상이고, 오히려 일시적인 것이 자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언어관 아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길 잃을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기준이 되는 세상은 언제거나 버티고 서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일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질서의 규준이 누구에게 속하느냐고 묻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최희진 연구자는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은 자신과 마주한 환경, 사물,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금 때론 낯설게 나타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확고한 중심(주체 또는 객체)을 기준 삼아 길 잃지 않는 법에 주목하지 않고, 낯선 관계를 재설정하는 ‘길 잃기 현장연구’를 시도합니다. 그녀는 도시의 기록과 기억이 지닌 무취성과 투명하고 차가운 관조적 시선에 포획된 도시 계획에 비판적으로 접근합니다. 길 잃어 진입한 작은 골목이 도시의 비릿한 기억과 전통을 되뇌는 길이 됩니다. 도시를 사유하는 어떤 합리성이 지닌 협소함에 연구 경험의 윤리를 개입하길 요청합니다. 도시의 전면과 이면을 서면 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기록자는 간단히 관조하지 못합니다. 골목의 정취가 한순간 사라지게 된 것을 몸소 느끼고,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랗게 구술로 남겨진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길 잃지 않기 위해서도, 흩어진 기억의 편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도 객관성을 요청합니다. 객관성이란 늘 개입이 전제되는 상관성 아래 놓여 있습니다. 윈투족의 방향 지음과 세상의 방위, 도시 기록과 연루된 연구자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권수빈 연구자는 각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단순히 지식이 상황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객관성이 지식이 처한 상황성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지식의 체현된 객관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적 지식들은 초월의 입장에서 보편적 객관성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고 모든 것을 역사, 사회, 문화적 구성물로 보는 급진적 구성주의와도 다르며 또한 체현된 객관성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모든 객관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와도 다르다.(권수빈, 「족대와 트랜스로컬」, 2쪽)


객관성이란 몸과 상황의 얽힘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일은 세계가 이미 얽힘의 구조로 있다는 사실, 즉 주체뿐만 아니라 모든 작용하는 것들이 세계의 살 속에 얽혀 있음을 밝히는 일입니다. 객관성은 체현된 지식이며 우리가 생성할 수 있는 지식은 자기-몸과 연루된 상황 내 지식일 것입니다. 무취성과 관조자의 시선이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고 오히려 상황 내 얽힘과 요청된 개입이 지식의 가능성을 조건 짓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희진, 권수빈 연구자  그리고 히스테리안 사이에 어떤 고리가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체현이란 몸이 얽힘의 구조에 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곧 잠재적인 공동체에 항시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질적인 몸이 강조되면서도, 동시에 공동의 것을 사유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인 상호 객관성과 지식/기록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객체들이 서로의 살 속에 연루되어 가는 장소를 최희진은 도시에서, 권수빈은 로컬에서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히스테리안은 이러한  발생의 장소를 ‘커먼즈’로 상상해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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