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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스테리안 Dec 09. 2022

[오픈리서치트립] 길이없는땅: 금란도

바다의 옛 흔적으로부터 환상의 도시를 탐험하기

도시들 역시 자신들이 정신이나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고 있지만 정신과 우연만으로 도시의 성벽이 지탱될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도시의 일곱 혹은
일흔 가지 경이로움을 즐기시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질문에 대해 도시가 주는 답을 즐기고 계십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61p

폐하, 폐하의 손짓 한 번에 따라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도시의 성벽들이
흠 하나 없이 높이 세워지는 동안, 저는 그 새 도시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사라졌을 다른 가능한 도시,
다시 세워지거나 기억될 가망이 없는 그 도시의 재를 긁어모을 겁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78p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는 황제 칸에게 그동안 다녔던 도시들에 대해 말합니다. 마르코 폴로가 여행하면서 보았던 세월을 견딘 도시들은 바람에 굴러다닐 죽은 이의 뼈도 없는 빈터, 바다의 옛 흔적이었지만 이젠 섬이 된 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성 바깥을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황제 칸은 마르코 폴로가 다녔던 도시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수집하여 환상의 도시를 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환상의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황제의 손짓에 따라 흠없이 세워진 도시의 경관은  낡고 허름하다고 여겨진 삶의 흔적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성 바깥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황제 칸이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만으로 듣고 세운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요? 모아진 환상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그것이 곧 환상적인 아름다움일 수 있을까요. 오픈리서치트립에서 우리는 황금알을 낳는 풍요의 땅이라고 불리는 금란도(충청남도 서천군)와 미래산업을 대표하는 수상 레저의 도시이자 캐릭터 해로의 주 무대 거북섬(경기도 시흥시),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땅 수정만(경상남도 창원시)으로 향합니다.  




프롤로그: 황금알을 낳는 풍요의 땅이라고 불리는 금란도


10월 22~23일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 다녀왔습니다. 나고 자란 곳에서 30년 가까이 미술교사와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인규 선생님과 향토사학자 유승광 선생님과 함께 장항의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두 분은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합니다. 고향의 기억을 공존하고 세월의 변화와 흔적을 고스란히 느낀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매번 이사를 가야 하는 저로서 떠나온 고향이 너무나 먼 옛일 같이 느껴집니다.


이번 오픈리서치트립은 충청남도 서천군의 장항읍과 금강 하구에 위치한 [금란도]로 향합니다. 장항은 일제강점기 때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수탈이 진행됐고 전략물자 조달과 결제 수단을 위해 '장항제련소'가 설립된 지역입니다. 해방 이후 제련소의 기능이 상실되고 군장국가산업단지 조성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지만 개발은 답보된 상태입니다. 금란도는 황금알을 낳는 풍요의 땅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여러 입장차포 30년 정도 표류하고 있는 금란도는 섬이 되어 버린 땅, 여러 욕망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장항에 도착해서 운행하지 않는 폐선부지와 장항항을 거닐었습니다. 산업이 발전이 되다 보니 사람이 몰려들었지만 또 기능을 잃으니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는 옛 터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출입이 제한된 장항제련소를 멀리서 지켜보기 위해 이동하면서 선생님들의 옛 기억 속 장항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습니다. 제련소 굴뚝에서 뿜은 중금속이 땅을 오염시킨 곳을 ‘브라운 필드’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미 터를 잡았던 모든 건축물과 생활 시설을 철거하고 토양을 세척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이미 썩은 땅을 빨래를 돌린 것처럼 돌린다면 땅은 깨끗해질까요? 제 방에 있는 빨간 국물이 튄 하얀 티셔츠가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자연화가 이뤄지며 철새들의 터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한 금란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금란도는 행정구역 상 군산에 위치하기에 우리는 서천군에서 금란도를 보기 위해 동백 대교로 건너 군산시로 넘어갔습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금란도는 우렁차 보였습니다. 무언가 짓는듯해 보이는 장비들이 눈에 보였고 생각보다 큰 섬의 규모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뒤를 하고 바다를 품은 강의 의연함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 강물의 혼탁함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프로젝트가 어떤 길을 만들어낼지 아니면 탁류에 휘말리지 않을지 그 방향성이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도시의 지속 가능한 삶터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저는 이곳까지 흘러왔습니다.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 본 글과 영상은 30년 동안 지역을 연구해온 김인규 예술가와 유승광 향토사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역의 이야기를 단순히 하나의 현상으로 치부하기보다 삶터를 연결해온 역사적 고찰을 바탕으로 오늘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영상 링크 : https://youtu.be/kcqKKEcNid4 ​


에피소드 1.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장항


충남 서천군 장항읍은 1929년 일본인 미야자키를 비롯한 요코야마와 당시 충남도지사 이수익의 결단으로 50만 평의 신도시를 건립하게 되었다. 50만 평의 간척지는 9년 후 장항읍이라는 인구 7,000명의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놓는다. 이 대단한 사실을 그들은 ‘장항 정신’이라고 표현하였다. 7,000명의 인구를 가진 장항 시가지를 바라본 그들은 이제 ‘황금알을 낳는 땅 장항’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과 부일 친일세력 조선인이 대동 단결하여 이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장항은 황금알을 낳는 신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것이 장항 정신이며 장항 사람들의 욕망이었다. 장항 정신이 이룩한 것은 무엇일까? 단적으로 조선땅 갯바닥 인구 1,000명의 마길면과 남부면이 합해 장항읍이라는 7,000명의 인구를 가진 거대 도시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1931년 개통된 장항선과 1936년 설립한 장항제련소, 1937년 부잔교 2개를 가진 장항항의 3박자가 장항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기능을 잃고 상실된 채 버려지거나 방치된 것들로부터 무얼 상상할 수 있을까. [필자제공]


1931년 개통된 장항선은 충남, 충북, 경기도 일대의 교통문제를 해결하여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는 쌀을 장항으로 운반하는데 기여하였다. 장항역에 도착한 벼는 하역하고, 도정하고, 미곡창고에 보관하였다 보관된 벼는 쌀로 도정하여 장항항을 통하여 오사카로 반출되었다. 이때 장항에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였다. 장항을 중심으로 서천 주변에서는 토지를 빌려 농사짓던 농민들이 이제 토지가 없어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는 장항을 찾아왔다. 그들은 신분과 토지로부터 해방된 맹목적인 조선 백성이 된 것이다. 아니 조쎈진이 된 것이다. 장항역에는 벼를 하역하는 노동자, 정미소에서 도정하는 노동자, 창고로 운반하는 노동자가 필요하였다. 장항은 인구 집산은 물론이고 쌀의 집산지가 되었다.


1936년에는 장항제련소가 조선총독부의 공모에 장항 정신을 가진 자들이 응모하여 장항이 선정되었다. 장항제련소는 1937년 중일전쟁을 위해 일본이 무기를 사들이기 위해 국제 결재수단이었던 금이 필요해 산금 정책을 추진할 때 만들어졌다. 많은 노동자와 석탄, 금광석이 필요로 하였다. 석탄은 장항항을 통해 선박을 통하여 일본과 국내에서 들어왔다. 이에 석탄과 광석을 하역하는 노동자들의 수용가 급증하였던 것이다. 새벽까지 장항의 장구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동아일보의 보도는 장항은 낙원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장항에 사우스라는 카페를 열었다. 그리고 여관과 목욕탕 상호가 낙원이었다. 장항은 남쪽에 있는 지상낙원이라는 욕망이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의 미명 하에 새로운 장항은 '욕망의 도시'가 되었다. 벼을 운반하는 장항선, 벼가 쌀로 바뀌어 오사카로 가기 위한 장항항, 그리고 석탄과 광석이 장항항에 도착하면 제련소로 운반하고 그것을 제련하는 장항제련소, 장항의 3대 욕망 덩어리이다. 일본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장항을 선택한 것이다. 그 욕망을 따라 토지가 없던 빈털터리 조선 농민들은 장항에서 노동력을 팔아 노동자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도약한 것이다. 그 노동자에게는 장항은 꿈에 상상도 못 한 낙원이었다. 장항은 1930년대 서천이 가지고 있었던 봉건사회를 이제야 탈피하듯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였다. 장항제련소, 장항항, 장항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계층이고 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장항은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었지만 일본인 게는 그들은 하나의 대동아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쟁의 부속품에 불과하였다.


장항은 쌀과 금과 사람이 얼러져 장항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 갔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도 할머니 중에는 조금만 해방이 늦게 되었으면 장항이 이렇게 사람이 없지 않을 텐데 하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바로 장항 발전에 대한 욕망이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굴레 속에 있었다. 그것이 깨우치지 못한 조선인의 욕망이 아닐까 한다. 일본은 어떠하였는가? 제국주의 욕망에 빠져 있던 일본은 결국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나서야 항복을 함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지 않았는가? 일본인들은 그 이후 제국주의 욕망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아메리칸식의 민주주의를 통하여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해방 후 장항은 장항제련소를 바탕으로 1980년 대 ‘장항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장항 인구가 30,000명에 달한 것이다. 장항제련소 월급날이 7일 날이면 8일 장항 장날 쌀값이 올랐다. 장항제련소 직원들이 8일 장날 쌀을 사들이기에 쌀이 부족하여 쌀값이 올랐다는 것이다. 7일 날 장항제련소 정문 앞에는 많은 여성들이 퇴근하는 노동자로부터 외상값 받으려고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다. 또한 장항제련소 다닌다고 하면 얼굴도 안 보고 딸을 주었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고 있다. 그렇게 1930년대 이후 장항은 해방 이후에도 장항제련소와 함께 낙원이었으며 욕망이 자라고 있었다. 드디어 1989년 장항제련소 굴뚝에 연기가 끊기고 노동자들이 온산 등으로 분산되고 해고되자 장항은 2022년 현재 11,000명의 도시로 급격하게 작아지고 있다. 이를 지켜보던 2006년 서천군수는 장군 공업단지 450만 평을 만들어 달라고 장항 읍민과 함께 상경투쟁을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450만 평을 포기하고 대안산업으로 장항 발전의 원동력을 삼고 있다. 즉 대안사업은 국립생태원, 국립 해양생물자원관, 국가 장항 생태산업단지가 장항 발전의 3박자가 되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인의 욕망이 빠져나간 도시 장항은 소위 회색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장항 사람들의 몸부림도 있지만 아직 잔잔한 용트림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장항에는 웅비하는 장항이라는 구호가 늘 따라다닌다. 그만큼 과거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장항 사람들은 그것이 욕망인지 삶인지 이제 결단을 내야 할 때이다.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 새로운 장항 사람들의 희망과 비전이 찾아올 것이다.


장항 사람들은 지금 30,000명 시대 장항을 바라고 있다. 장항 정신으로 만든 제국주의 장항, 욕망이 빠져나간 장항, 그 빈자리에 금란도는 장항 사람들에게 다시 욕망의 섬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금란도에 대한 기대를 하는 장항 사람들은 거의 드물지만 장항에 대한 욕망이 컸던 만큼 다시 욕망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길 기대한다. 그 욕망이 금란도에서 시작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길 없는 땅 금란도를 동백 대교를 걸으면서 바라보았다.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에 길이 없는 금란도에 가창오리 떼처럼 둥지를 틀어보았다. 욕망은 가져볼 만한 것일까?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일까?  


필자: 유승광

30여 년 간 서천의 역사문화 생태를 연구하고 있다. 그것 또한 욕망이었다. 욕망이 새로운 서천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버리지 못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에피소드 2.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장항


한국수산지(韓國水産志)에 의하면 1910년의 장항지역은 대부분이 바닷물과 강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으며 기껏해야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다. 제국주의 침략과 맞물려 1920년대 본격적으로 간척이 되어 장항이라는 새로운 도시가 탄생하였다. 식민지의 농산 어업 산물과 금, 은, 동의 비철금속의 수탈 기지로 자리 잡았다. 장항선 철도와 장항항, 그리고 장항제련소가 그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그러나 철도는 이제 폐선되었고, 제련소 또한 문을 닫았으며, 장항항도 겨우 어선들의 선착장으로서 역할을 할 뿐이다. 인구가 몰리고 경제가 부흥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지금은 멈춰버린 시간의 흔적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장항과 관련하여 욕망을 말한다면, 그것은 부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부흥을 꿈꾼 것과 맞물려, 그 물산의 움직임에 따라 일자리가 창출되고 사람들은 이곳에 몰려들었다. 어르신들이 ‘한때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것은 지역의 지도와 경관을 바꿔놓았다.

그렇지만,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났을 뿐 아니라,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80년대 말 제련소의 용광로의 불이 꺼졌으며, 인근 주민은 중금속 오염지역을 떠나야 했다. 강물을 농업 용수로 이용하고자 새로 건설한 금강하구둑이 강물의 유속을 둔화시켜 뻘이 쌓이면서 장항항의 기능은 서서히 죽어갔고, 어업생산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산업도시로서 기능이 죽자 장항선 열차마저 들어오지 않게 되었고, 현재 폐역만이 댕그러니 남아있다.  이에 장항을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라고 부를 만하다.

장항의 서천경찰서 앞에는 일제강점기 정미소로 사용되었던 건물 한 채가 남아있다. 이는 현재 쓰이지 않고 있으며, 폐허처럼 덩그러니 외벽만 남아있다. 내용이 빠져나가버린 텅 빈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를 욕망이 아주 빠져나가버린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이 이런 방식으로나마 버티고 있는 것은 부동산으로서 값어치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최근 오래된 건축물이 주목을 받으면서 소유주는 언젠가 비싼 값에 팔 요량으로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마지막 욕망을 부여잡고 있는 폴대로 서 있는 듯하다. 무척이나 위험해 보이면서 말이다.                          


장항중앙시장, 한때 사창가로 사람들이 북적였던 골목이다. 시장의 기능을 잃은지 30년 가까이 되었다. 지금은 몇몇 노인들이 남아 주거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제공]

장항읍은 이런 식으로 빈 건물이 즐비하다. 특히 옛 장항 중앙시장이 있던 곳은 아주 심각하다. 한때는 상인과 소비자로 북적거렸고, 특히나 성산업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렇지만 이제 상업활동은 멈췄다. 대부분 비어있거나 몇몇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30년 가까이 그런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이 헐어지거나 하는 일이 없이 말이다. 대부분 지역을 떠난 분들의 소유지로 되어 있는데, 언젠가 돌아올 부흥은 아니더라도 혹여나 있을지도 모를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꿈을 꾸며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브라운필드는 미국에서 1970년대에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대체적으로 오염되었거나 개발이 진행되지 않고 유휴지가 되고있는 토지를 일컫는다. [필자 제공]


그에 비해 브라운필드 지역을 가보면 주택도 철거되고 논 밭도 사라진 상태이다. 사람의 발길이 완전히 끊기자 이 지역은 자연화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습지로 변했으며, 갈대가 자라고 동물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겉보기에는 중금속 오염지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욕망이 빠져나갔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더 이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런 곳 말이다. 설령 건축물이 남아있더라고 정말 사람이 빠져나간다면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일 것이다.  장항역 폐선부지 또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자 점점 자연화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금세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랐다. 그런데 철로부지를 재활용하고자 하는 지역사회의 욕망은 그 풀과 나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기적으로 제초를 하고 있었다. 그 공간을 지키고 재활용하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다.

폐선부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자연화가 진행된다. 그러자 이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풀과 나무를 제거하였다. [필자제공]


장항지역은 주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시스템에 의해 융성했다가 쇠퇴해버린 도시다. 그것은 어쩌면 지역 주민의 욕망과 관계없을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외적으로 강제되었으며, 그렇게 쇠락한 것이다. 어쨌든 상황이 변하고 이제 욕망이 박탈되었다면, 그것이 다시 찾아들 때는, 어딘가, 무언가, 다른 맥락을 찾아 들어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느닷없이 자연공간을 침범하여 들어왔을 때 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필자: 김인규

장항이 포함된 지역 서천군 서천읍에서 태어났으며 현재까지 살고 있다. 30년 가까이 미술교사를 하였고, 현재는 지역에서 다양한 예술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장항에 있는 서천군문화예술창작공간에서 2017년, 2018년 개최된 <굴뚝의 꿈/장항 리서치 전>, <미술보다 장항/장항 리서치 전>에 참여한 바 있다.

   




* 본 프로젝트는 아르코 공공예술 주제심화형프로젝트 <예술로 가로지르기 -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 출몰지>의 일환으로 진행됩니다. 소식 - https://www.instagram.com/around_across_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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