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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담자 P Mar 26. 2020

자작시 | 버스는 정직했다

'곧 도착'과 '20분 후'  

두 단어 사이에 낀 나는 탄식한다

앞 버스는 놓칠 게 뻔하고

뒤차를 타면 지각이야


전속력으로 뛰어볼까 했는데

눈앞에서 쌩하니 스쳐간다

어차피 못 타니까 힘들여 뛰지 말란 거다

고맙다 고오마워


아직은 햇살이 들지 않는 정류장

의자에서 찬 기운이 올라와 몸이 으슬하다

앉은 듯 만 듯 끝에 살짝 걸쳐 앉아

다리를 부지런히 떨어본다


아직 오려면 멀었단 걸 알면서도

시계와 전광판과 도로 저 멀리를 번갈아보며

이제나저제나 언제쯤 오려나

눈을 도록도록


바바리 입은 그녀도 가고

체크무늬 재킷 그도 가고

나만 남아서 우두커니

내 버스는 10분 후에나 온다지


시간이 도통 가질 않아 사람 구경을 한다

신발을 스무 켤레쯤 보았을 무렵

멀리서 반가운 숫자가 보여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다


아아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류장이 코앞인데

바로 앞 횡단보도에 걸렸다

고걸 못 지나오니 고걸


버스에 후다닥 올라타 의자에 푹 파묻힌다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대리님 죄송해요

뻔한 문자를 보내고 잠에 빠져든다


내가 잠시 눈 감은 새에

날 회사에 데려다줘 버스야

이십 분을 한 시간처럼 기다린 날 위해

기적 같은 초스피드를 보여줘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내릴 곳이다

생각보다 빨리 온 걸까 싶어 시계를 보니

기적은 없었고 버스는 정직했다

따악 20분만큼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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