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을 받기 전에는 막연히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나는 평생 정신과 가거나 심리상담받을 일은 없어."
상담실에 갔을 때도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굳이 심리상담까지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괜히 유난 떠는 것 같아요. 제가 상담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 맞는지 확신이 안 서요."
심리상담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이런 질문도 종종 하시더라고요.
심리상담은 어떤 사람들이 받는 건가요?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받는 거 아닌가요?
제가 가진 문제 정도로 심리상담을 받지는 않죠?
저, 심리상담받아야 하는 상태인가요?
내가 심리상담받아야 하는 상태일까? 내가 가진 문제로도 상담실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이 글을 읽어보시길 바라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강도를 기준으로 내가 High Level, Medium Level, Low level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살펴보시면 됩니다.
1. 현재 내 삶에 상당히 문제가 있으며,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2. 현재 내 삶에 문제가 있으며, 일상생활 또는 신체 컨디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나는 특별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의 달라진 모습이나 컨디션에 대해 걱정하곤 한다.
4. 아래 중 하나 이상 해당하는 증상이 있다.
[감정] 우울, 불안, 공포, 분노, 좌절, 무기력감, 회의감, 심한 감정 변화, 감정이 무뎌짐, 의욕/흥미 저하
[신체증상] 과도한 긴장, 스트레스, 원인을 모르는 두통, 소화불량 등, 불면/과수면, 식욕저하/과다, 피로감
[그 외] 중독(쇼핑, 게임, 술, 담배, 폭식, 성관계, 과도한 물건 수집 등), 공격성/폭력 충동, 자살/자해 충동
1. 현재 내 삶에는 다소 문제가 있으나,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다.
2. 내 삶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고민 때문에 막막하다.
3. 내 삶에 특별한 문제는 없지만, 해결하고 싶은 오래된 문제가 있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4. 아래와 같은 고민/스트레스/트라우마가 있어서 누군가와 함께 의논해보고 싶다.
[관계] 친구/지인, 가족, 연인, 부부, 직장 스트레스(동료, 상사 문제, 감정노동)
[생활/변화] 학업/진로문제(공부 스트레스, 진로, 진학, 직업선택, 직업 변경), 이사, 직장문제(이직, 입사, 퇴사, 휴직), 자녀문제(임신, 출산, 육아)
[트라우마] 연인과의 이별, 사건/사고, 가까운 이의 질병, 죽음 등
1. 내 삶에 특별한 고민이나 문제는 없지만 나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들여다보고 싶다.
(나의 성격과 기질 파악, 내가 가진 잠재적 문제나 어려움 발견)
2. 내 삶에 특별한 고민이나 문제는 없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댈 대상이 필요하다.
(마음이 답답할 때 얘기할 대상이 필요하다)
3. 순전한 호기심으로 심리상담을 한번 받아보고 싶다.
4. 나와 내 주변 사람(부부, 연인, 친구)의 차이에 대해 함께 검사를 받아보고 싶다.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당하는 레벨은 세 가지 중 무엇인가요?
"High Level만 심리상담받는 거 맞죠?" 이렇게 물어보는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실, 이 테스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결과 해석도 없습니다.
열심히 골랐는데 왜 결과가 없냐고요?
사실은, 위에서 무슨 문항을 골랐더라도 여러분이 심리상담을 받을 이유는 충분합니다. 심리상담은 누구나, 언제든, 어떤 문제로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너무 심각해지기 전에 미리 받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아야 할 지에 대한 기준을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는지', '일상생활이 불가능한지' 등으로 High level에만 두시는 분들을 위해 오늘 글을 써봤어요.
'조금 마음이 힘들 때가 있긴 하지만 엄청 심각한 건 아닌데... 굳이 심리상담을 받아야 하나? 심각해지고 나서 받는 게 낫지 않나?'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심각해진 이후에 상담을 받으면 그만큼 원 상태로 회복되는 기간 또한 오래 걸립니다. 어쩌면 정신과 약물치료까지 병행해야 할 수도 있어요. 마음의 문제라 느낌이 잘 안 오실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몸 건강으로 비유를 하면 이해가 좀 더 쉽습니다. 치과 치료를 오래도록 미루었다가 뒤늦게 다른 곳까지 다 썩어버려서 더 큰 비용이 지출되고, 더 많은 치아를 치료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상담을 통해서 미리 쌓아둔 심리적 자원은, 삶을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큰 힘을 발휘해요. 상담을 통해서 평정심, 회복탄력성, 버티는 힘 같은 마음의 근육들을 기를 수 있는데, 그런 심리적 자원들은 나중에 내가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조금 더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 줘요. 슬프고 절망적인 사건, 크나큰 실패와 같은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에서도 내가 완전히 무너져버리지 않게 해 주고 조금 더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줍니다.
결과 해석이 없는 대신에... 저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드릴게요.
저는 마음이 우울한데도, 우울을 부정하려 애썼어요. 바쁘게 살면, 취미를 가지면,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면
그런 마음이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고 풀어가려는 방법이 아니라 고통을 잠깐 회피하고 눌러두는 식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맛있는 걸 먹고, 쇼핑을 하고, 여행을 다니며 스트레스를 풀어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어려운 상황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끊임없이 흔들렸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내색을 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남들도 다 힘든데, 원래 인생이라는 게 다 힘든 건데 나만 약한 소리 하는 것 같았거든요.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내 힘든 마음을 이야기해봐도 "야, 나도 그래. 뭐 어쩌겠냐. 아휴, 힘내자! 다 잘 될 거야. 일단 맛있는 거 먹고 기분 풀자!"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았어요.
내가 가진 문제를 잠시 잊어보겠다고 음주, 폭식, 게임, 쇼핑 등으로 괴로움을 눌러두는 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아요. 저도 우울했던 기간은 꽤 오래됐는데, 너무 늦게서야 찾아간 편이긴 합니다. 완전히 무기력과 우울이 심해져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오고 나서야 정신과도 찾고, 심리상담도 받게 되었거든요. '조금 더 일찍 갔으면 좋았을 걸.' 후회도 많이 들어요. 대학교 다니면서 내내 원인을 모른 채 우울모드였는데, 학생상담센터를 안 찾아가 본 게 아직도 한이 돼요. 남한테 고민 상담하거나 기대지 말고 혼자서 풀어야 한다는 주의였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냥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상담도 받고, 적극적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았겠다 싶네요.
저는 지금까지 30회기 정도의 상담을 받았습니다. 비용 부담은 물론 있었지만 심리상담을 받은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제 삶을 정말 크게 바꾸어놓은 경험이거든요. 지금은 우울감이나 무기력이 정말 많이 좋아졌고요. 그래서 이렇게 내담자이지만 심리상담에 대한 글을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마음 상태가 너무 심각하게 나빠지기 전에, 전문가에게 적절한 치료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몸의 건강이 소중하듯이, 마음의 건강도 소중하니까요.
심리상담에 대해 너무 멀게만 느끼시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