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hongmin Nov 03. 2021

내가 프러포즈를 할 줄이야

그것도 99층에서

난 정말 몰랐다. 내가 프러포즈를 할 줄이야. 심지어 잠실에 우뚝 솟은 저 거대한 빌딩의 99층에서.


예전부터 막연하게 갖고 있던 생각이 있었다. 만약에 내가 프러포즈를 하게 된다면, 결혼 전에 깨야하는 미션처럼 의무감에는 하지 말아야지. 결혼 준비라는 걸 시작하기 전에 정말로 나랑 결혼해줄래 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프러포즈를 해야지. 어쩌면 결혼에 대한 나의 로망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단어가 슬금슬금 존재감을 드러낼 때 프러포즈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들 했나 싶어서 회사 동료에게 프러포즈를 어떻게 하셨냐고 물어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잠실에 있는 시그니엘 호텔에서 프러포즈 패키지를 통해 프러포즈를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관련 영상들이랑 준비하셨던 것들을 보여주시는데 일단 혹했다. 여자 친구가 야경 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높은 곳에서 프러포즈를 한다면 기억에도 많이 남고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더 좋은 방법도 있을지 모르니 유튜브도 찾아보고 이곳저곳 검색을 다 해봤는데... 이건 뭐 다른 게 눈에 차지가 않았다. 이미 좋은 걸 봐서 그런지 다른 건 프러포즈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한다고 해도 내가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은 시그니엘 호텔에서 프러포즈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프러포즈 날을 잡아야 했다. 프러포즈는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거니까 (아닌가) 여자 친구 모르게 준비하려면 뭔가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했다. 의심을 주지 않고 호텔로 여자 친구를 부를 수 있는 어떤 핑계.


다행히 프러포즈를 하고자 하는 시점 근처에 500일이라는 기념일이 있었다. 기념일을 핑계로 호텔 레스토랑에서 야경을 보면서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다행히 의심 없이 넘어가 주셔서 날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곤 완벽한 시나리오를 세웠다.

프러포즈 전에는

회사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이라 휴가는 쓸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레스토랑을 특정 저녁 시간에 잘 예약했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프러포즈 당일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출발한다(라고 생각하게 하고 나는 일찍 와서 방을 꾸민다)

누가 봐도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다만 한 가지 걸렸던 건 만나기로 한 시간 전까지 내가 방을 다 꾸밀 수 있을까... 였다.


방을 잡고 나서 다른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케이크.

이전에 한 번 주문한 적이 있었던 케이크 집에 연락을 해서 주문을 했다. 이전에는 생크림으로 꽃을 표현한 플라워 케이크였는데, 이번에는 좀 더 이쁘게 하고 싶어서 색깔이 들어간 버터크림 케이크로 주문했다. 빵 시트는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레몬 시트가 선택지에 없길래 여쭤봤더니 해주실 수 있대서 레몬 시트로 주문했다.


이번엔 프러포즈 반지.

귀금속은커녕 반지 한 번 사본 적 없는 내게 반지 구매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듣기로는 종로에서 반지를 구매하려면 최소한 한 달 전에는 가서 주문을 넣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제일 급하게 준비를 하게 되었다.


반지 사는 곳은 회사 동료분에게 추천을 받아서 결정했는데, 문제는 반지 사이즈였다. 커플링을 맞춰본 적도 없고 사이즈를 직접 재본 적도 없어서 좀 막연했다. 그래도 몰래 준비하는데 대놓고 사이즈를 잴 수는 없어서 여자 친구의 친한 친구에게 물어봐서 대략적인 사이즈를 얻어냈다. 종로에 가보니 어느 정도는 틀려도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대서 안심하고 주문을 넣을 수 있었다.


근데 이 글은 팁을 전하기 위한 글은 아니니까 위 내용은 쓰다가 말았다.


내가 잡은 프러포즈 컨셉은 기록이었다.


프러포즈에서 흔하게 하는 장식물들을 제외하고도 지금까지 함께 했던 기록(사진, 영상)들을 함께 보면서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고, 또 프러포즈하는 오늘을 추억할 수 있는 새로운 기록물들을 만들고 싶었다.


먼저 과거의 기록물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함께 찍었던 사진들과 영상들을 꺼내보았다. 기록들을 꺼내보니 함께한 행복한 추억들이 많다는 게 새삼 더 크게 느껴지고, 이러한 행복한 감정을 여자 친구도 같이 느낄 수 있게 잘 준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잘 나온) 사진들을 인화한 후 시간대 별로 정리했다. 메인 사진이다 싶은 것들은 조그마한 액자에 넣어서 세워두고, 그 외 사진들은 바닥에 깔아서 우리가 함께 해온 시간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찍었던 영상들도 모두 한 번씩 다시 보면서 함께 보고 싶은 영상들을 정리하고, 자막과 내가 부른 노래를 BGM 삼아서 영상을 편집해두었다. 처음으로 영상 편집이라는 걸 해봤는데 생각보다 재밌어서 기분 좋게 편집을 진행했다. 새삼 그동안 사진이랑 영상을 많이 찍어뒀던 게 뿌듯했다.


BGM으로는 좀 더 정성을 담고 싶어서 스탠딩 에그의 little star라는 노래를 집에서 녹음해서 넣었다. 집에서 노래 부른 게 처음이라 옆집이나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트북으로 MR을 틀고 아이폰으로 녹음했다. 이게 다 추억이지... (근데 중문이랑 창문들 방음이 잘 되어있어서 굳이 이러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긴 했다.)


프러포즈 당일에는 오늘을 추억하기 위해서 브이로그 같은 느낌으로 집을 나선 순간부터 프러포즈를 했던 그 순간들까지 영상으로 모두 담았다.


부케와 케이크를 픽업하고, 세탁소에 맡겨놓은 옷을 찾아오고, 체크인하고 라운지에서 기다리는 모습, 방을 꾸미는 모습, 여자 친구와 방에 들어와서 프러포즈를 하는 모습, 야경을 보면서 함께 저녁을 먹는 모습 등등 새롭게 쌓은 오늘의 기억들을 영상에 차곡차곡 담았다.


이렇게 담아놓은 영상들을 편집해서 하나의 영상으로 만드니, 인생에서 중요했던 오늘을 기억에서 뿐만 아니라 영상으로도 현실감 있게 추억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오늘을 더 느낌 나게 기억하고 싶어서 준비한 하나의 장치가 있긴 했다. 동생이 추천해준 방법이었는데, 세미 드레스 같은걸 준비해 가는 거였다. 보통은 브라이덜 파티 때 많이 하긴 하는 것 같던데, 나랑은 안 하니까... 나랑도 좀 더 결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내면서 사진도 찍고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세미 드레스에 더해서 생화 부케도 준비하고, 웨딩 베일도 준비해 갔다. 베일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잘 몰라서(아직도 몰라서) 좀 애를 먹긴 했지만, 좀 더 이쁘게 추억을 남길 수 있게 많은 도움이 됐다. 동생이 집안일은 안 도와주는데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되긴 된다.


프러포즈는 다행히 별 탈 없이 잘 끝났다. 방을 꾸미는 게 생각보다 좀 더 걸려서 진땀을 빼기는 했지만, 여자 친구도 고맙게 잘 받아줬고, 나로서도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아직도 내가 프러포즈를 했다는 게 잘 믿기지는 않는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프러포즈였는데, 이벤트를 준비하고, 앞에 서서 편지를 읽어주고, 무릎 꿇고 반지를 끼워주고 이런 것들이 떨리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좀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여자 친구가 때때로 그때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며 영상을 돌려 본다고 할 때면 다행이다 싶고, 여자 친구와 지금 결혼 준비를 잘해나가고 있는 걸 보면 프러포즈가 성공한 게 맞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아무튼 우리는 프러포즈라는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쌓았고, 기록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기억들을 함께 만들어 갈 예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결혼을 할 줄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