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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Sep 19. 2022

가지 않은 길

 어느 날 두 권의 책이 내게 말을 건넸다.




그날, 우연히 내게 온 두 권의 책  그 마지막 장을 넘길 때.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중략...

먼먼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한참 동안 생각에  들어 나는 그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육십 대의 중반을 넘어가며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천천히 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날들이었는데... 책 속에서 만난 두 저자들은 삶의 어느 시점에 과감하게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때 꿈꾸어 보았던 길,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풍경 속에 날 것 그대로, 노안을 지닌 50대 중반 여자가 서 있었다.

내가 그녀였으면...


 한 우물을 파는 것, 그 길에서 성공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던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일과 육아 그리고 가정이라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때로는 많이 힘들어하면서도 나는 50대의 중후반까지 한 길을 걸었다.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정년이 보장되었던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오로지 그 일이 좋아 계약직의 길을 택한 나는 가늘고 길게 외길 인생을 살았으되 성공한 삶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실패한 삶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질문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안정된 기자의 시간을 잠시 접어두고 첫서재를 낸 남형석 기자, 소설가로서의 꿈을 접고 실패자에 관대하다는 땅 아이슬란드로 떠난 그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봄날 같은 삶을 향한 열망을 지니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새벽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마치 서서히 불길이 잦아드는 숯불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시간 속에서, 마음속 불길이  다시 살아나 이글대고 싶어 한다. 그 책들이 준 에너지를 맘껏 받아들인 나는 내 마음의 불길에 숯을 더 넣어 조금은 더 오래 이글대고 싶어졌다.





첫서재를 방문하다. 서재 문 앞에서 바라만 보고 오셨다는, 좋아하는 브런치 작가님과 함께 가고 싶었던 곳이다(7. 19. 2022).
7월 어느 날의 메모장에서

병문안을 간 춘천에서 헤어지기 싫어하는 어른과 함께 예정에 없던 첫서재를 방문하게 되었다. 요리조리 좁은 골목길에서 만난 첫서재는 작가님의 글 속 사진에서 보다 더 작고 아담했다. 혼자였다면 한참 앉아서 바라보고 싶어 했을 창가의 자리에서는 바깥 풍경이 정다운 사진이 담긴 액자처럼, 내가 오래전부터 알던 친근한 춘천의 옛 모습을 담고 있었다. 서재의 한편 책장을 스르륵 밀면 짠 하고 화장실과 다락으로 가는 문이 나타난다. 화장실은 자그마한 샤워부스 커튼도 세면대의 모양도 누르스름한 화장지조차도 아기자기 예쁘다. 그 문에는 제주 광천포에서 왔다는 작은 고래그림이 걸려 있었다. 글 속에서 본 작은 고래. 이제 그 고래도 새 길을 향해 떠날 것이었다. 첫 서재가 문을 닫는 날에.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2022

서른아홉의 끝자락에 쓴 그의 글 속에서 쿵 하고 와닿았던 것은 돌아보면 매번 '너무 늦은 나이'였다는 부분에 대한 그의 이야기였다. 나이에 맞게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그렇게 살아내느라 하고 싶은 걸 포기해 버리곤 하는 같은 패턴의 삶을 반복하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라고 물어온다면, 내겐 올해야. 다시 살아가는 기분이거든. 다만 소망이 있다면. 내년 이맘때쯤엔 '내년'이라고 답할 수 있기를. 늘 그런 삶이기를."


잠시 일상의 삶을 멈추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작가의 작은 열망을 담은 장소인 ‘첫서재’. 그 책의 일부분이 쓰였을 장소에서 작가의 싸인이 담긴 책을 산 나는 읽는 내내 글 속에서 그가 독자에게 바랐던 잔잔한 봄의 기운을 얻었다.

추억 속의 춘천, 그 사랑스러운 도시, 봄내에서.


잠시, 가던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걸어 본 작가의  그 시간은 그의 삶에 풍부함을 입혀주는 시간이 될 것이리라. 그 좁은 사잇길을 걸으며 보았던 수많은 풍경들은 그의 삶에 다양하고 더욱 풍성한 색깔을 입혔을 것이리라.


용감하게 잘 닦여진 길을 벗어나 소롯길을 걸어간 작가의 글이, 부끄러우리만치 무모함으로 참고 참으며 소소한 한길을 살아낸 그야말로 '고작 이 정도의 어른'인 나에게 참으로 신선한 비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날 나는 무미건조한 노년의 시간을 달리 채워줄 작은 책방 순례의 꿈을 마음에 담았다.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강은경 2017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에서 71일간의 히치하이킹 여행.

어느 날부터 노안으로 돋보기안경을 쓰게 되면서 처음 늙음을 자각했다던 쉰셋의 여자가 있다. 소설가의 꿈을 꾸었고 부단한 노력으로 인생의 모든 결핍과 상실에 맞서 왔다는 그녀는  지리산에 산다. 결혼에 실패하고 고국에 돌아와 15년 만에 다시 대학에서 창작 공부를 하고 소설을 썼다는 그녀. 딱 입에 풀칠할 정도의 푼돈을 벌며 소설가로서 등단을 위해 오랫동안  도전했다는 그녀. 어느 날 아이슬란드에 빠져 2015년 6월 고작 300여 만원의 돈만을 들고 물가가 높아 장기여행이 어렵다는 나라로 떠났다는 그녀.


북대서양에 위치한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남한 만한 크기에 32만여 명의 바이킹의 후손이 산다는 땅이란다. 국민 열 명 중 한 명은 작가, 여섯 명 이상은 음악가이고 백야와 오로라, 빙하가 뒤덮인 얼음의 땅과 화산이 살아 숨 쉬는 불의 땅이 공존하는 나라란다. 스스로 실패자라던 그녀는 실패를 찬양하는 곳이기에 한없이 끌려 몸으로 부딪치며 광활한 자연이 존재하는 그 땅을 여행하고 기록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녀의 여행경로를 지도에 하나씩 이어가면서 그녀의 궤적을 들여다보았다. 사진들이 책의 앞부분에 먼저 수록되어 있어서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해당하는 글 속의 풍경을 찾아야 했던 구성이 조금 낯설었지만 사진 속 곳곳의 풍경을 지도상의 위치와 맞추어 짚어 보면서 그야말로 무모하리만치 힘들게, 아이슬란드 전역을 히치하이킹으로 이루어 낸 그녀의 여행길이 때론 흥미진진하고, 때론 애처롭고 서글프기도 했고, 때론 놀라웠다.


언젠가 지구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처음 본 아이슬란드의 정경은 마치 다른 행성에 온 듯한 풍경들이어서 경이로움을 느꼈었다. 또한 그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친구의 사진으로도 보아 많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그날의 감흥을 더 느끼고 싶어 세계 테마 기행 아이슬란드 편을 찾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곳의 풍경을 다시 찾아볼 만큼 그녀의 이야기는 상상력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여행은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거울삼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 김 태용 감독

그녀의 여행은 최소한의 소유로 하는 여행이었기에 나를 더 바라볼 수 있었고, 또한 오히려 더 사람들 속으로, 더 자연 속 깊이 걸어 들어갈 수 있었으리라. 그 길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녀의 사유의 뜰 속에는 반짝이는 깨달음이 얻어져  스스로를  치유하게  하였으리라.


[여행자의 시간 속에서 : 함께 나누는 공감들]


- 무엇이 되어야 할까(338p ): 우리는 늘 크고 거창한 꿈을 가져야 한다고, 너무 강요받으며 사는 건 아니었을까요? 꼭 목적을 갖고, 꼭 꿈을 갖고 살아야만 하는 걸까요? 그 꿈이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나를 늘 불행하게 만든다  해도? 그래야만 꼭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늙을 수도 있구나(389-390p): 70대 미국 할머니의 홀로 여행. 텔레비전 앞에 붙어사는 삶을 부정하는 여행. 남극에 한번 간 적이 있어서. 북극에도 한 번 오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기운이 샘솟았다. 아, 이렇게 늙을 수도.

-  자신에게도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였는가가 아니라 언제가 행복했던 순간이었는지 물었어야(400p): 그렇게 살아야.

- 지금 하고 싶은  뭐니(444p): 수시로 땅속에서 불이 솟구쳐 오르고 땅이 뒤집히는 걸 보며 사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있어 질문은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 가  아니라 지금 하고 싶은 게 뭐니?라는 것. 삶을 여행하듯이 살아야지.

-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실패는 메인 코스다(453p): 실패는 성공담을 위한 애피타이저인 세상이지만 아이슬란드에서 실패는 메인 코스다

당신 실패한 게 맞아요? 당신은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살았잖아요. 그랬으면 됐지. 난 당신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에겐 사는 게 뭐죠?

- 실패에 관대한 것은 대자연의 위력을 경외심에서 바라보는데서 생겼을 것이라고(469p):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실패에 관대하다고 들었어요. 정말 인가요?

"실패를 해야 뭐든 다시 도전하고 시도할 수 있잖아요? 실패를 많이 할수록  새로운 것에 더 많이 도전할 수 있게 되죠."

- 인생의 축소판 같은 여행, 53년의 시간을 71 동안 다시   같은(469p): 실패한 여행도, 실패한 인생도 아니었다. 결과가 실패인들. 순간순간 살아 있음에 희열 하며 눈물 나게 사랑했는데.

떠나기 전과 돌아온 이후 일상은 바뀐 것이 없었다. 단지 일상을 맞는 마음이 확 달라져 있었다.





돈이 많아도 병든 이는 허전하고 허기져서 달래줄 따스한 사랑이 그리워 운다.

지닌 것 없어 남보다 헛헛한 이는 가지고 싶은 것을 지니지 못해 허탈하다.

그런 많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 지닐 것에 대한 욕심을 거두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삶의 빛을 따라 난 수풀 무성한 작은 길을 자칫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용기를 지니고 발걸음을 내디딘 그들의 삶을 돌아보다가 ‘나는 어떠한가?’ 나의 가지 않은 길들을 생각했다. 그 긴 밤 책을 덮고 누워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려 창을 조금 연채로 새벽까지 나는 깨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 나이는 처음이다. 두 책이 내게 말한다. 내게 다가오는 늘 처음인 노년의 초입길에서 작은 시도일지라도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르게 작은 오솔길이라도 잠시 걸어보는 삶을 꿈꾸라 한다. 근사하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들을 찾아 나만의 방향을 찾으라 한다.  뒤돌아본 살아온 날들을 사랑하되  나의 시선을 앞으로 돌리라 한다.

작고 소박한 것들로 이루어질 느린 일상의 시간들이어서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 묻히지 않도록. 지금 나는 수동적으로, 보고 싶은 것들을 찾눈길 너머 조금은 능동적으로 진정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본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직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늘어가는 흰머리와 함께 '싶은' 리스트들을 적어 내려간다.

할 수 있을까? 작으면 어때, 무언가 되기보다 즐기면 되지.


험한 세상 속 누구나 아픈 사연 하나쯤 지니고 있는 우리는 모두 숲 속에 핀 한 송이 꽃이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두 작가의 글이 우리를 꽃처럼 살라고 한다.

피어나는 그 한 때를 그 꽃의 시간으로 살라고 한다.

 


Main  Photo : by  Filip Zrnzevi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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