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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Jan 24. 2022

지루함과 사랑에 빠지다

필사의 즐거움




루틴이 나를 메고 간다




필사의 시작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경험 수집 잡화점이라는 곳에서 글쓰기 모임을 하다가 또 다른 모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였다.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해보고 싶은 마음에 매일매일 짧은 글이지만 좋은 글귀를 여러 사람과 같이 쓰고 인증을 하는 필사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얇은 노트가 제법 빼곡하게 채워져 갈 무렵 이젠 스스로  내가 좋아하는 책을 필사해 봐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학창 시절 나는 필기를 유난히 싫어하던 아이였다. 혼자서 교과서의 한 구석에 또는 노트의 빈 공간마다 자유롭게 무언가를 끄적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시간에 이루어지는 반강제적인  필기는 항상 피하고 싶은 일중 하나였다. 배운 내용을 대충 머릿속에 집어 놓고는 필기는 늘 뒷전으로 밀어두던 나였다.

한 번은 중학생 시절 특별활동시간. 글을 쓰기 전 긴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게 해 주시던 선생님과의 짧고 강렬했던 문예반에서의 시간이 참 좋아져서 오랜만에 정성 들여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제대로 쓰는 일이 좋아지던 즈갑자기 그 선생님이 떠나시게 되었고 새 선생님을 맞이하 되었다.

좋은 시를 알게 해 주시려는 뜻이었을까.  멋진 그림의  사진들을 오려 붙이고 알려진 시들을 옆면에 적는 것이 새로운 선생님의  수업 방식이었다. 시 필사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특별 활동반으로 옮기고 말았다. 그렇게 보고 적는 일(단순히 적는 일이라 여겼고)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마치 육체노동으로 엉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듯이 매일 필사를 한다. 여러 페이지를 써본 적도 있었지만 부담스러워서 요즘은 하루 딱 한 페이지만을 써내려 간다.

처음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를 시작으로 ‘무소유’(법정), '정원 일의 즐거움'(헤르만 헤세),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법정), '사막의 우물'(생텍쥐베리) '스스로 행복하라'(법정) 등이 지금까지 써온 것들이다.


 유난히 글씨가 안 되는 날이 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이 어지러울 때는 나의 글씨가 먼저 나의 마음을 안다. 무엇이 불안한지, 무엇이 나를 흔드는지.,. 돌아보면 여지없이 혼란한 내 마음 상태가 글씨 속에 있다.

어느 때는 한 달 가까이 비어 있을 때도 있다. 농사일에 정신없이 보낸 날들 일 때도 있고,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해 침체되어 있는 날들일 때도 있다. 그런 날들이 지나면 다시금 펜을 잡는 날이 돌아온다. 다시 펜을 잡게 되는 순간 다시 나를 추스르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필사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나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는 거울인 듯하다.


홀로 식탁 의자에 앉아서 한 잔의 차를 앞에 두고 글씨를 쓰는 시간은 나의 내면의 뜰을 가꾸는 시간이 다. 여기저기 풀들이 무성한  돌밭 같은 황폐한 마음 밭을, 한 귀퉁이에서부터 풀을 매고 돌을 골라 나가는 듯한 시간이다.

이렇게 음악도 없이 홀로 앉아 쓰는 시간,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나를 가다듬는다.


홀로 있으면 비로소 내 귀가 열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듣는다. 새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를 듣고 토끼나 노루가 푸석거리면서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꽃 피는 소리를, 시드는 소리를, 지는 소리를, 그리고 때로는 세월이 고개를 넘으면서 한 숨 쉬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곧 내면의 뜰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_ 소리 없는 소리 1977년('스스로 행복하라' 중에서, 법정


어느 날의 나의 필사 노트
그리고 네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누워서 들어. 그래야 네 목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야.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날아다닐 수 있는 거야. 네 목소리는 들을수록 새롭기만 해. 그건 영원한 영혼의 모음이야.
아, 이토록 네가 나를 흔들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네 영혼이 너무도 아름답고 착하고 조금은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샘물이 고여 있어서 그렇듯이.
네 소중한 장미와 고삐가 없는 양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안녕
_ 영혼의 모음 :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1971년 ('무소유' 중에서, 법정)


그냥 눈으로만 읽어 내려갔다면 보고 잊혔을 것들이 쓰는 눈에는 더없이 새롭기만 하다. 노트 위의 에 표시를 해두고는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고 생각에 잠긴다.  

꽃이 피고 지는 소리, 세월이 고개를 넘으며 한숨을 쉬는 소리... 스님의 표현이 가슴에 담겨 온다. 그리고 나에게도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는 말을 실감케 하던 바람 부는 후박나무 숲. 귀 기울이고 바라보던 숲의 시간이 떠오른다. 

내가 숨 쉬는 자연 속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들은 무엇인가, 저자와 같은 책을 읽고도 내 마음에 지 못했던 것들은 무엇일까? 스님처럼 한 책을 사랑하여 스무 번도 더 읽고 홀로의 시간을 부단히 노력한 다음에야, 담을 마음의 품이 넓어지고 새로운 눈으로 많은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가만히 쓰던 손을 내려놓고 밖을 내어다 본다. 오늘의 산책길에서는 내 귀를 더 열어 놓으리라.

오늘 밤엔 나도 어린 왕자를 만나 보리라. 잠들기 전, 책을 다시 펼쳐 읽고는 불을 끄고 누워 어린 왕자 너의 목소리를 들어 보리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법정)'

필사가 내게 준 것은 무엇인가.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그 읽는 시간을 넘어서, 필사는 오롯이 짧은 시간이나마 나를 비추어 보는 시간을 갖게 주었다. 

또한 필사를 하다 보, 여느 때 보다 글을 자세히 게 된다. 어느 날 헤세의 책을  다 보니 그 글이 내가 써 본 글이었고, 엮는 과정에서 같은 글을 다른 책에도 싣고 있음을 되었다. 두 책을 비교해 보며 같은 글이라 할지라도 번역자에 따라 글을 맛이 달리 느껴진다는 것도  수 있게 되었다. 쓰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글의 세세함을 더 눈에 담은 까닭에 역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번역의 미묘함까지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숲 속에서 또는 들판에서 만나게 되는 아주 작은 꽃들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가?

아주 가까이 눈을 뜨고 바라보면 작은 꽃들이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눈 맞추고 아주 가까이 보면 더욱더 예쁘다.

필사는 그런 눈으로 글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좋아하는 책을 써내려 가다 보면 작가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듯이, 내 손으로 써 내려간 노트 한 귀퉁이에  그날 느낀 나의 감정과 물음을 생텍쥐 베리와 헤세, 법정스님께 던지고 그 만남에서 얻은 느낌을 짧게나마 써 내려가는 이 시간이 즐겁기만 하다.

'사막의 우물'의 한 부분


오늘은 랍인 조르바의 한 구절을 읽고 스님이 쓰신 글이 내게 말을 건넨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쌓인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도대체 무엇이요?"
 - '희랍인 조르바' 일부분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주문이다. 우리가 읽고 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낸 게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 벌레에 그치고 만다.

 - 태풍 속에서 (1986 년) : '스스로 행복하라', 법정


잘 읽고 싶다.

그리고 좋은 글들을 쓰고 싶다. 

새록새록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런 글들을.

넘치지는 않되 넉넉한 그런 글들을.


잔잔한 필사의 시간.

조금씩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움튼다.

지루함을 즐기고 사랑하는 씨앗이 움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책의 다른 판, 나의 필사 노트는 사랑하는 책의 좋은 글 위에 내 생각의 순간들이 덧 씌워진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언젠가 써내려 갈 좋은 나의 글들을 만나게 될 날들을 기다리며 오늘도 한 페이지 정성껏 글을 써내려 간다


오늘도 루틴이 나를 떠 메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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