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파성 난청이 왔어요.
기본적이고 당연한 감각의 상실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 공포감이 들었다.
“무리야” 라는 말 뒤에 숨거나 뒷걸음질 치다 보면 세계가 좁아진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오히려 약간 무리해야 삶이 재밌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작은 무리가 쌓여 영원히 재미없는 삶을 살뻔했다.
신나게 벌린 일들이라 마냥 설레고 신나서 새벽에 깨고, 밤 늦게까지 붙잡고 있었다. 몸은 피곤할지언정 마음의 스트레스는 없었는데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이라는게 웰니스걸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 차라리 노래를 많이 들어서 그렇다고 해주셨더라면 덜 억울했을까. 그래도 노래는 끊지 못했겠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먹고, 생각하고, 자고, 운동하고, 물도 많이마시고! 근데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와 저주파성 난청이라니.
사실 전조증상은 있었다. 가끔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삐-소리가 나기도 하고, 혼자 꼬르륵 물 속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증상. 비행기에서 그러는 것처럼 코를 막고 뿍!하면 사라졌다. 뿍!으로 사라지지 않은건 3주 전에 처음 발생했다. 아침에 일어날때부터 계속 웅웅~~하며 물 속에 잠겨있는 느낌. 잠을 덜 잤나 싶어 커피 대신 따스한 차를 마셨다. 출근을 해도,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아 회사 옆 이비인후과를 갔다. 별로인 병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청력도 정상인 것 같고, 오른쪽 고막이 조금 눌리긴 했는데 별 문제 없으니 진통제를 준다고 했다. 오후가되고 집에 오니 괜찮아져서 진통제는 먹지 않았다. 그냥 좀 피곤했나 싶었다.
어제 다시 물 속에 잠겼다. 잠긴 상태로 이어폰도 오래 끼고 있고, 야근까지 했다. 집에 와서 또 새벽까지 글을 썼다. 그래놓고 오늘도 출근 전 하고 싶은 게 많아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여전히 물 속이었다. 무서웠다. 하루 자고났는데 물 속이라니. 얼마 전 릴스 알고리즘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돌발성 난청의 무서움에 대한 영상을 봤다. 회사에서 한정거장 떨어진병원을 갈까 하다가, 조금 찾아보니 골든타임이 중요해서 처음부터 큰, 전문병원을 가라고 했다. 찾아보니 청담에 ‘소리 이비인후과’가 있었다. 이름부터 ‘소리전문’. 물 속에서 미팅도 하고, 일도하다가 조금일찍 퇴근해 마지막 진료시간에 검사를 시작했다. 2시간 정도 걸린다는 검사는 다양했다. 고막과 청력, 달팽이관 검사까지 귀에 이것저것 쑤셔넣고 다양한 소리를 들었다. 듣는 내내 머릿 속에는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귀가 안들리면 어쩌지..
다행히 검사 결과는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청력 손실. 다행인건가. 다행이라는 말이 맞는건가. 왼쪽 귀의 청력이 정상 이하로 갑자기 떨어져서 저주파를 듣지 못하는 상태. 그래서 먹먹한 느낌이 드는 거라고 했다. 강력한 스테로이드 6알을 하루에 두번씩 챙겨먹고, 이걸 먹으면 잠이 안올 수 있어서 신경안정제까지 챙겨준다고 했다. 무엇이 청력을 떨어뜨릴 정도로 스트레스를 준걸까.
이럴 땐 빠르게 root를 점검해봐야한다. 몸과 마음이 아플 땐 최근의 일상을 세세하게 조각내어 보면서 어떤 요인때문이었는지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한다. 별로 무리안했는데, 스트레스 없었는데는 내생각이고 아무리 신나게 했더라도 무리였을 수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 내가 느껴도 뇌가 팽팽도는 느낌, 새로운 인풋과 그동인의 수집이 만나 마구마구 연결되며 뇌가 야근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확실히 무리였다.
-고정 일정이 여러개 생겼다. 캘린더에 점(일정 있음)이 있는 상태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설레고 재밌는 일들이 있긴하지만 그 일이 무엇이냐와는 별개로 ‘무언가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 컨디션과 상황, 기분에 따라 유연하게 스스로 선택하는 일상의 흐름을 좋아하는데 밤 9시나 10시에 고정 미팅이 있으면 나도모르게 압박감과 계속 신경을 쓰게 되고, 못들어가는 날에는 불편함과 마음의 부채감까지 생긴다. 물론 이 고정일정으로 많은 것들을 얻고, 해내고 있지만 이 방식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고정 일정 다이어트할 것. 내 흐름에 맞게 조정.
-외부 일정과 만남이 많았다. 사실 작년부터 만남을 의도적으로 줄였다. 누군가와 만나면 당연히 그 대화에서 얻는 에너지와 인풋들, 경험을 흡수할 수 있어 좋지만 나의 에너지 상태는 그걸 모두 감당하기 힘든 상태였다. 올해 1월 들어 서서히 만남을 시작하다가, 2월엔 그동안 만나지 않던 사람들까지 모두 만나고 주변에서 하는 것들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모두 찾아다니다보니 알게 모르게 피로감과 스트레스기 있었나보다. 물론 만남 자체는 정말정말 좋았지만 그 만남을 위해 평일에 몰아해둔 일들과 이동, 휴식시간의 감소의 영향이 크다. 3월엔 정말 최소한의 만남!(이라기엔 이미 잡힌게 너무 많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동시에 많이 시작했다. 출판과 인풋/아웃풋클럽, 위잇북클럽 브랜딩과 오프라인 확장, 호비클럽 북토크까지. 출근 전과 퇴근 후에 동시에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하다보니 뇌가 쉴 시간이 없었다. 그냥 정말 아무 생각없이 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수면시간도 줄었다. 점심에 운동하거나 플젝을 하다보니 뭔가 식사도 부실해지고, 가만히 햇볕쬐며 커피마시는 시간도 줄었다. 새로운게 들어서면 나의 루틴이 깨지다보니 자연스레 부실해지는 부분이 생긴다. 적당한 새로움을 추구할 것.
-욕심 내려놓기. 어느샌가 또 욕심을 내고 있다. 가족들의 걱정이 딱맞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들은 세상에 ‘나’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니 조급해하지말고 원씽 원타임! 조급해하지말고 여유챙기기.
-하고 싶은 말, 해야하는 말을 못한 것들이 몇 개있었고, 하고싶은 것이 많으니 ‘해야하는데’ 라는 to do list로 인해 늘 약간의 긴장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약간의 흥분상태가 지속된 것 같다. 들뜬 상태가 오래되는 것도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나.
작년에 병원비 20만원밖에 안나왔다고 떵떵거렸는데, 바로 이렇게! 그래도 동네 병원 가려다가 전문 병원으로 빠르게 가서 전문 검사 받고 약타오니 청력을 잃을까하는 불안에 떨지 않아서 좋다. 사우나로 푹 지지고 집와서 모든 일정 취소하고 소고기에 밥 먹고 누웠다. 현관문 앞에 놓인 건강한 땅, 건강한 먹거리, 건강한 몸이라고 적힌 택배박스가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건강한 정신, 건강한 마인드, 건강한 몸. 모두 이어진다. 맥북만 안켰다 뿐이지 또 침대에 누워 아이패드 붙잡고 이 이야기도 콘텐츠로 써버리는 나. 또 새로운 매거진 연재를 승낙한 나, 위잇북 포스터 만들고 있는 나. 괜찮은가요~ 정말~~~! 또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근데 정말 하고싶어서 머릿속에 계속 생각나는 걸 우짭니까~~~
기어나가서 읽은 노니님의 책에 무리에 대한 얘기가 또 있었다.
항상 평균보다 체력이 좋은 편으로 살았던 사람은 귑게 무리하는 선택을 한다….
만성이 되지 않게 잘 관리해야지. 당연하고, 기본적인 감각을 상실하면 나의 세계가 무너진다. 제발무리하지 말자. 오늘 맥북은 이만 ‘잠자기 모드’
그리고 잠이 안와서 신경안정제 한 알! 나는 약 크기가 작고, 한 알인게 더 무섭더라 이 작은게 얼마나 독하면 나를 잠재워.
*얼마 전 다시 검사를 받고, 돌발성 난청이 아닌 '저주파성 난청'이라는 진단을 받아 정정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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