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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di Mar 13. 2016

아가들의 투쟁 8(입양아들 이야기)

WOULD YOU BRING ME HOME?  

 




겨울밤, 응급실 문이 벌컥 열리고 칼바람과 함께 이동식 침대를  들고 119 구조사들이 들이닥쳤다.

어둑어둑하여 으슥한 길거리에서 산모가  출산하는 것을 누군가 신고하여  출동한 구조대원들이 데려온 것이었는데, 아가는 아직 탯줄이 붙어있는 상태라,  탯줄을 소독 가위로 자르고 신생아 중환자실로 바로 안고 뛰었다.  


  다행히 그 추운 겨울날 길거리에서 태어난 것 치고는ㅡ그리고 산전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것 치고 , 상태가 나쁘 않았다. 몸무게도 좋았고, 처음에 저체온으로  경도의 산혈증이 있었으나 (혈액상 PH가 호흡곤란이나, 대사가 좋지 않을 때 등등의 이유로 정상 유지하는 산도보다 낮아지게 된다-정상범위에서 벗어난 정도에 따라 위중한 정도가 다르다.) 따뜻하게 해 주고 산소마스크를 대주자 다행히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x-ray에서는 아무래도 폐에 손상을 받았었지 폐가 접혀(Pneumothorax-기흉) 있는 것이 보여 산소를 보조적으로 주기로 했다.

 

 기구한 출생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가는 산소를 먹으며  접힌 폐도 펴졌고, 약간 올라가 있는 감염 수치도 항생제를 쓰면서 잘 회복되어 퇴원을 할 수도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퇴원시 누가 데려갈 것인가였다.

  일단 아가의 부모가 불명확했다. 아가를 낳은 엄마가 분명 있기는 했지만, 엄마는 자신은 아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생부가 누군지도 불분명했다. 별거 상태인 전남편도 아빠가 아니라고 하고  산모와 함께 온 "남자 사람 친구 " 라던 외국인 노동자가 아빠라는 추측이 들었으나 그는 자신은 아빠가 아니고 친구일 뿐이라며 고개를 도리질하고 있었다. 어떻든 엄마는 아가의 입양을 원했다. 면회도  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제 먹고 키우면서,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때는 사회사업팀에서 연결시켜 준 홀트 복지기관과 같은  입양기관에 보내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예뻤다.  늘,  " 기구한 아가들은 참 예쁘게 생겼어" 하고 우리들끼리 말하곤 했는데,  하품도 하고 찡그릴때도, 뽀뽀하면 이상한 표정을 지을 때도, 너무 예쁘고, 보드랍고 연했다.  아기 냄새와 분유 냄새가 섞여있었다.  다른 아기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지만 다른 점이 단 하나 있다면, 아가가   다 큰 애들처럼 눈치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안아주면  진정이 되었으나, 잠시라도 사람들이 잠이 든 아가를 요람에 뉘어놓았다가 깨어나면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꼭 자기가 버림받은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사람 손이 그리운 것처럼.

 버리지 말아달라는 것처럼.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기저귀를 갈아줄 때가 된 건지, 아니면 어딘가 불편하고 아파서 우는 건지,  조금씩 울음소리가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그 아가의 울음소리에는  딱 짚어 말하긴 힘들지만, 그러한 것이 있었다.

설움. 버림받을까 봐 눈치 보는 아가의 울음.

나만 이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서, 간호사들과 우리들, 그리고 회진도는 교수님까지 아가를 애처로워했다.

회진 도시는 교수님은 입양처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아가를 볼 때마다 "선생이 좀 키워봐~" 하고 농을 던지셨다.

실제로 나는 아가가 그렇게 울 때마다  내 집에 데려갈까,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데려가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다.


   상처 입히면 너무나 가슴이 아플 것 같은 그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추운 길거리에서 태어나 이제 어느 길을 가게 될지 알 수 없는  아가의 아픔과, 동시에, 아가를 가지고 싶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IVF를 하러 우리 병원을 찾는 간절한 부모님들을 생각했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 투성이다.


*

 여기서  그녀,L 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인턴을 마치고 뉴욕  맨해튼에 있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성화와 맞서 난 미국에서 Job을 가질 거라고 공부를 하던 시기다.  한참 금융위기로 달러가 천정부지로 솟고 있는 터에,  돌아오라는 부모님을 두고 용돈을 받아쓰려니 미안해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좀 했다. 의류 쇼핑몰 1일 알바를 한다던지, 뉴욕 Bryant park에서 fashion week 때 서울을 홍보하는 역할로 부스의 hostess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일주일 내로 끝나는 것이기도 했고, 또  영어실력도 시험해 볼 수도 있는 기회라 지원한 거였다. 서울시에서 나온 서울을 홍보하는 부스였고, 옆쪽에는 구글, 앞쪽에는 메르세데스 벤츠 부스가 있어 나름

좋은 위치에 있었다.  

 나의 역할은 웃으면서 "Hello~ Welcome~"  하며 한복을 입고 서울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관광을 promotion 하는 그런 도우미 역할이었고 비녀나 전통 문갑 등의 상품을 내건 이벤트도 하였다.  

 친해진 경비아저씨나 패션쇼 스태프들, fashion week 동안 자주 들러준 손님들에게는 사실 친분 찬스를 이용하여 좀 더 이벤트에 더 잘 당첨되게끔 해주기도 했고, 나중에 그 스태프들이 패션쇼장에 들여보내 주어서

유명 모델들의 쇼를 좋은 자리에서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었다.

   

   이때 그 홍보모델을 할 때 만난 재미있는 인연들 중 한 명이 그녀 L이다. 홍보 부스에 들어와, 서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유난히도 관심이 많던 그녀가 내 이메일 주소를 물어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한류에 관심이 있는 재미 중국인일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게  그녀가 보낸 메일들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한국에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입양아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호기심도 많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많 그녀는 한국에 유학 와   연세어학당도 다닐 정도였었다.

그러던 그녀다 보니, 뉴욕 패션 위크에  모처럼 한국, 서울의 부스가 열려있는 것을 보고 많이 반가웠던 것 같다. 어쩌면 모르는 사람이 메일을 보내고, 만나기를 원하면 경계를 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의 가장 큰 이유는, 단지- 내가 그녀의 가족들과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드는 미안함과 책임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한국에 대한 어떤 끈을 유지하고 싶어 했을 때,   한글을 가르쳐주거나 한국인과 미국인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대화 하거나하며 가끔 만났다.   후에  그녀가 한국에 방문한다고 했을 때,  집을 구하지 못 그녀를  한국의 우리 집에서 두 달가량 지내게도 하고, 어버이날 모임이나  가족들 모임에 데려가며 한국의 분위기, 문화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나중에 계속 생모를 찾고 싶어 하던 그녀가  엄마를 만났을 때, 모친은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중풍을 앓고 있었고 의사소통이 한국어로든 영어로든 잘 되지 않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다른 언니들은 한국에 있었고, 막내였던 그녀와 다시 교류하기 시작하며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시작하였다.


   오랜 시간 미국인 오빠와 부모와 살았던 그녀는, 미국적인 개방적인 마인드 외에는 한국음식을 좋아하고, 한국 문물을 재미있어하며, 외모까지 토속적인 천상 한국인이다.  친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언제나 긍정적인 그녀, 미국인 부모님 밑에서도 교육 잘 받고 밝게 잘 자란 그녀를 보면, 그 미국 부모님들에게 내가 다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한국이라는 집단에 집단지성/혹은 집단적인 영혼/ 집단적인 몸..과 같은 것 이 있다면, 그녀는 한국인이 잃어버린 세포 어느 한 부분이고,  꼭 그 세포 한 부분을 그들에게 맡겼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는 그녀와 ,

사랑으로 키워졌다면, 버려지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여의치 못했던 아가들이 오버랩된다.

신생아실에 가끔씩 아기들을 고, 몰래 도망가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아마 어느 병원에든 있을 것이다.

  응급실로 신생아들을 데려와 입양기관에 맡기는 경우도,정말 비정하긴 하지만  집에서 죽은 아가를 비닐봉지에 싸서 아무렇지 않은 듯 아가의 시신 처리만 해달라며 오는 경우도 있었다.(어떻게 죽었는지 나는 깊이 상상하고 싶지않았다.그럼에도 나는 검은 봉다리의 악몽에 한동안 시달렸었다.)

  

그러므로 L은,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은 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웠기에 어쩌면 더 좋은 환경에서 자기 딸이 자라게끔 선택을 한건 아니었을까? 입양을 해야 하는   이러저러한 상황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또 반대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이 아이들이 한국의 혈연과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이 왜 없을 것이며 이미 꽃이 되었대도 어찌 뿌리에 대한 관심과 슬픔이 없을 수 있을까. 어찌 상처가 없을 수 있을까. 입양된 가정 안에서 학대를 당하는 사건들도 종종 뉴스를 장식하며, 해외 입양아를 입양한 국가에서 국적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누가 좋아서 그런 상황을 다 생각하고 자신의 자식을 입양시킬까? 버려지는 아가들과 버리는 부모의 문제의 해결에는, 정부의 복지 정책및 시스템적인 보조장치가 분명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일수는 없는것 같다. 그들이 결손가정 및  미혼모에 대한 뿌리 깊은 멸시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그러니까 이 사회 구성원들이  타인에게 좀 더 관용을  가지게 될 때야만    해결이 될 것이다.


   언젠가 미혼모임에도  자신은 꼭 아가를 낳을 것이고, 키우겠노라며  미숙아로 태어난 아가를 nicu 퇴원까지 기다려, 데려간 엄마를 기억한다.

결코 한국사회에서는 여자 몸으로 쉽지 않은 일일텐데,아가들을 너무도 쉽게 버리는 세상에  꿋꿋이 아가를 키우겠노라 결심하고 기쁘게 아가를 기다린 엄마에게 내가 다 고마워서 레지던트 월급으로  분유와 기저귀를  작은 선물로 드렸었다.


 여담이지만-L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국으로 입양된 남자친구가 사는 독일과 미국과 한국 사이를 오가다가,  현재는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다.

결코 녹록지 않을 입양아들의 삶,그들이 다시  <집>을 보듬어가고 쌓아나가는 과정을, 그러니까 뿌리 깊은  삶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REFERENCE :

http://adopteerightscampaign.org)

http://www.nytimes.com/2015/04/01/magazine/adam-crapsers-bizarre-deportation-odyssey.html?_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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