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간질 간지럼을 태우는
봄이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봄을 느낄 수 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오후의 눈부신 햇살 덕분에 나뭇가지들에 붙어있는 작은 잎들이 금방이라도 기지개를 켤 것만 같다. 잎들 사이로 작은 꽃봉오리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자꾸자꾸 하늘을 쳐다보며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온다고 딱히 좋은 일이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은 조금 더 바빠질 것이고, 역할도 조금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자연이 가진 힘과 에너지를 더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일까? 파릇파릇한 생동감이 온 우주에 전해져 움츠러들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꿈틀거릴 것 같다. 간질간질 간지럼을 태우면서.
그런 간지럼을 참을 수 없어 얼마 전 한 달에 한 번씩 꽃을 배달해주는 꽃 구독 서비스를 그에게 톡으로 보냈다. 무언의 협박에 그는 곧 시켜주겠노라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꽃이 오지 않아 하루에 한 번은 더 재촉해야 했다. "꽃은 언제쯤 올까?" 그는 주문하겠노라고 했지만 두 번의 톡을 더 받은 다음에서야 주문한 눈치다. 그래도 뭐, 봄은 오고 있고, 예쁘고 향긋한 꽃도 도착했으니 기쁘게 고맙노라며 머리와 볼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6개월 동안 아마 한 달에 한 번씩, 꽃이 배달 올 때마다 그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꽃을 구독할 수 있어서 이렇게 고마움을 예약해 놓을 수 있다니 참 좋은 서비스다. 많은 남자들에게 권해주고 싶을 정도다. 별이나 달을 따달라는 것도 아닌데, 꽃 배달쯤이야. 사랑하는 그녀를 위하여! :)
생각해보니, 이번 봄은 벌써 서른여덟 번째 봄이다. 그렇게 많은 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봄은 5년 전 5월의 봄이었다. 부동산에서 소개해준 사무실 창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벚꽃이 흩날리는 풍경에 반해 그날 바로 계약을 했다. 개인사업을 시작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은 봄날이었다. 막 이혼을 했고, 싱글맘으로 네 살 된 아이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만약 내가 그 풍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사무실을 계약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센터를 오픈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삶은 어땠을까? 아마도 많은 것을 타협했을 것이고, 적당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지 않은 선택을 후회했을 것이다.
그랬다. 그 봄날의 벚꽃은 그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고, 알알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이치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떨어지는 꽃 잎들이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그렇게 두라고 어깨 위로 내려앉아 토닥토닥이며 자신도 나와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떨어지더라도, 그렇게 사라지더라도, 있는 힘껏 피어나는 꽃처럼 살아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당장 가진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고 여겨져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내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주문을 걸었다. 어쩌면 그 주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루하루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자는 생각은 여전하니깐.
하지만 5년이 지나서 또 다른 봄을 기다리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할 수 있는 만큼만'과 '할 수 있는 만큼'은 엄연히 다르지 않을까? 어느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잘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때는 '만'이라는 합리화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기준을 정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만'이라는 기준을 잊고 살아온 것 같다. 마치, 흰 여백에 내 멋대로 쓰는 일기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어쩌면 5년이라는 시간이 나를 조금 더 자라게 한 걸까. 그래서 이번 봄은 유난히 더 기다려지나 보다. 머리가 아닌 몸이 느끼는 봄은 내 안에 있는 무엇을 깨울 게 분명하니깐. 그것이 위로, 용기, 감동을 느끼게 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안녕!"하고 기쁘게 맞이하고 싶은 그런 봄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