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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애 Mar 02. 2017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억

얄궂은 불청객이자 선물

너무 피곤해서 온 몸을 축 늘어지고 눈꺼풀도 무겁지만 고즈넉함을 즐기고 싶다. 잔잔한 인디밴드 음악을 틀어놓고,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를 다시 읽으면서 문맥의 뜻이나 행간의 의미보다 글을 쓴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 그런 새벽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미세한 창틀 사이로 세어 들어오는 찬 공기를 데우고,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딱딱한 키보드가 전해주는 촉감조차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내 모든 감각이 깨어나 나를 느껴달라고 아우성치고, 아직도 많은 것이 잊히지 않았노라고 지난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덮쳐 뒤숭숭한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기억은 불꽃처럼 찰나의 순간 반짝거리며 빛나다가도 순식간에 사그라들기도 한다. 이유 없이 불현듯 떠올라 가끔은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기억은 소중한 선물처럼 기쁨이나 깨달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어떤 기억도 온전한 사실 그대로는 아니라서 미화되거나 왜곡되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지난 기억의 사건이나 사람의 의미를 구태어 따져 묻는 것은 소모적이라 여겼다. 기억에 부여한 의미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멋대로 해석 것들이라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고, 비록 그럴지라도 이제 와서 어쩔 도리가 없으니깐. 과거에 연연하기보다는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가 반드시 과거로 끝나지 않더라. 때때로 반복되어 현재가 되기도 하더라. 그래서 과거에 어떤 의미로 남은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상당히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람은 고유하고 일관성 있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과거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때 비슷하게 행동하니깐.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의지의 정도에 따라 비슷한 상황에서도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의식이나 반성에서 비롯되는 의지도 과거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더라. 그래서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행위를 우습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억압되고 봉인된 기억을 해부하고, 분석하고, 머릿속으로 재현하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안 좋은 기억은 쿨하게 잊으면 그만인데 그럴 수 없어서 찝찝하고, 이해되지 않는 순간은 함께했던 상대를 만나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은데 이미 남남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럴 수도 없어 답답하다. 사과를 받을 수도 없고, 사과를 할 수도 없으니 미해결 된 과제로 남아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불현듯 사과받고 싶고, 별안간 사과하고 싶다. 대상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아서 다른 대상에게 전이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고 과거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현재는 더 살아내기 벅차다. 


환경이 순식간에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상황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뭐, 사람의 성향은 더 말해 무엇하랴. 어쩌면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은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원을 살아가고 있지만 움직이는 시침과 분침에 의해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영원성을 탈출할 수 있는 열쇠는 과거의 기억 속에 있을 수도. 그래서 불현듯 섬광처럼 떠오른 기억은 현재와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도. 그런 기억 속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면 현재에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보다 나은 게 아니라 다른 기억에 존재하는 자신보다 나은 것은 아닐까. 


나눌 수 없어 외롭고, 어쩔 수 없어 안타깝고, 돌아갈 수 없어 그립지만 오롯이 나만이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은 얄궂은 불청객이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조금 더 나아져서, 조금 더 자라서,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면 기꺼이 선물이 될 수 있으리라. 오늘부터 하나씩 마주해보자. 많이 슬플지도, 많이 기쁠지도, 많이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내 안에 있는 것들이기에 모두 소중하게 하나씩 꺼내보련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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