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인 삶에 변화가 필요할 때
감정이 메마르고, 내가 나라는 것을 잊고 지냈다는 것을 느낄 때. 문득 내가 예전처럼 감정적이지 않으며 감각을 활용하지 않고, 일상에 추억이라는 조각을 세긴 지도 오래되었음을 깨닫게 되면 괜스레 서글퍼진다. 어른들의 시간은 이성을 요구하는 업무들의 연속과 감정에 충실할 수 없는 일상들로 가득 찬다. 그래서 너무 메마르지도 너무 출렁이지도 않을 정도의 감정을 유지한 채 자신의 말과 행동에 적당한 책임도, 적당한 자유도, 적당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정의 조율이 참 중요하다고 여겨왔다. 더군다나 사회적인 나의 역할이나 책임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것이 더 많다 보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참 조심스럽고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성은 감각들이 증거를 날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 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
감정에 충실했던 시절이 있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혼자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고, 밤새워 음악을 듣거나 글을 써보기도 했다. 나의 감정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통념에 맞서서 열변을 토한 적도 있고, 그러다 상사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사표를 써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감정에 충실한 순간들이 나에게 준 선물은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이해하고 있느냐'를 알게 해주었다는 점이지만 그런 순간들이 늘 합리적인 선택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그런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유난스럽고 별나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다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깐.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감정에 주목하는 행위는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되기도 했다. 미처 이해하지 못 한 나의 감정 때문에 상대의 감정도 이해하기 힘든 탓이겠지만 내가 느끼는 것을 상대가 느끼지 않는다는 것 혹은 상대가 느끼는 것을 내가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이질감이고 밀착된 관계를 위한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 여겼다. 결국,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깊이만큼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자아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애초에 욕심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의 청춘은 욕심만 많았던,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생채기를 남길 수밖에 없었던 채로 끝나버린 것 같다.
"우리 시대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출이 가능하냐의 여부에 달린 것 아닌가.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슬픔을, 쏟아지는 은하수에서 환희를, 친구의 행복에 기쁨을, 밀러의 5번 교향곡 4악장에서 비애를, 멋진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시부모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를,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치욕을,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면서 불안을, 이 모든 감정들의 분출로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 강신주 [감정수업] -
정말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 동력은 역시 감정이다. 어떤 감정이든 생각이나 판단보다 먼저 느껴진다. 그 느낀다는 것이 이해되기까지는 노력도 필요하고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감정은 그냥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그것은 감정이 합리적인 선택이나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음을 깨닫고, 어느 정도의 실패와 상처를 경험한 후에 몸에 밴 일종의 습관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감정을 해부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에 대한 배경지식은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보다는 해석하고, 판단하고, 단정 짓는 단계를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지금 ~~ 감정을 느끼는구나!'로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 같다. 마치 사이보그처럼.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감정에 서툴렀던, 그래서 감정을 느끼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던 시절의 경험을 통해 '감정에 대한 두려움'이 자랐기 때문이다. 감정에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이고 싶지도 않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고 싶지도 않다는 무의식이 감정을 억압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는 기제는 긍정적인 감정을 억압하는 기제로 발동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는 기제는 긍정적인 감정을 회피하는 기제로 발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감정은 나에게 두렵고, 복잡한 절차를 통해 이해해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삶의 감동도 슬픔도 기쁨도 빛바랜 사진처럼 오래된 것으로 느껴졌나 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소중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보지 못 하는 것을 봐주고, 이해해주면서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듯, 감정도 애초부터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어떻게 봐주느냐, 이해하느냐, 해석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감정으로 느끼게 된다면 감정을 느끼기 전부터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감정조차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과 나의 기준에서 즐겁거나 기쁠 수 있을만한 일에만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작은 일에도 기쁠 수 있는 것, 있는 그대로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그 감정을 더 풍유롭게 만들어나가고 싶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조금 더 감각에 충실한, 감정에 솔직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녀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그래서 싫었던 말은 '여자라서 그래'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심지어 사랑까지도 그 사람 고유의 판단과 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의 하나로 해석되거나 혹은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치부될 때, 다시 말해 '그건 그 애라서 그래'가 아니라 어려서 그래. 여자라서 그렇지 뭐. 와 같은 말들이 존재를 외롭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은 왜 그렇게 힘이 들까. - 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
그러려면 힘든 것도 벅찬 것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표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불평도 불만도 하지 않은 채,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는 것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억압하게 하니깐. 어쩌면 의연한 척, 꿋꿋한 척, 괜찮은 척, 강한 척, 똑똑한 척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나의 감정을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들보다 부정적인 말들을 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그래서 나 역시 아직은 덜 자랐음을, 미성숙함을 인정해야만 하더라도 그로 인해 조금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또한, 감정은 온전하게 내 것이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마음을 이해하는 습관이므로 나를 둘러싼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이해한 시각으로 관조적으로 나의 감정을 바라보고, 이해하되 솔직하게 느끼고 표현해보자. 지.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