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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혜진 Feb 28. 2018

숲 앞에서 전화를 받았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졸고 있던 나는 받을지 말지 망설였다. 받았다. 오는 전화도 거의 없는 이 시절, 안부 전화를 하는 친구가 고맙지 않은가. 그런데 안부 전화라는 걸 받기 전부터 알 수 있다니? 보험 가입을 권유하거나 결혼 소식을 알리거나 돈을 빌려달라는 게 아니라는 걸 미리 알 수 있다니?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특별하고 좋은 일이구나.


  졸면서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친구가 전화 너머에서 웃는다. 바로 옆에서 배를 잡고 깔깔깔 웃는 것 같다. 친구는 내가 웃기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재밌다며 웃는다. 그럼 난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이 친구 앞에서는 저절로 무장해제되고 솔직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게 좀 엉뚱하게 들리는 모양이다. 하긴 졸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웃음이 날 것 같긴 하다.

 

  우리가 그런 때에 접어든 것인지도 몰라. 친구가 말했다. 주변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직장인도 있고 우울해하는 아기 엄마도 있어. 그치만 그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 버티고 있는 거 아닐까? 난 요새 내가 뭘 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친구는 호들갑을 떠는 일이 없다. 그저 차분하게 말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놓인다. 그래서 내가 어젯밤에 그 꿈을 꾼 건가? 친구가 꿈을 꿨단다.


  네가 차를 운전하고 있었고 내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어. 어느 학교에 들어가더니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더라고. 서로 대화하는 걸 듣게 됐지. 네가 장르를 바꿨다는 거야. 으응? 장르를 바꿨다고?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더라니까. 다른 사람이 무엇으로 바꿨냐 물어본 것 같아. 그랬더니? 그랬더니 이젠 테크노 미술을 한다고 그러더라고. 테크노오 미수울? 응. 우리는 웃는다.


  근데 정말 그런 게 있어? 글쎄, 그런 이름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요새 다시 방향을 찾고 있어서 네가 그런 꿈을 꿨나보다. 그치만 내가 뜬금없이 미술을 한다고? 우리는 또 웃는다. 친구와 나는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화했다. 그러다가 문득 친구와 관련된 일이 생각났다. 참, 최근에 말야. 2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어. 내가 작업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너한테 전화가 왔었어. 오늘처럼? 응. 오늘처럼.


  그때 좀 이상했어.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심장이 뛰고 영화에서처럼 천장이랑 바닥이 빙빙 돌면서 뒤집히는 것 같더라고. 머릿속은 웅웅거리고 아무도 없고 아무도 날 도와줄 사람이 없단 생각이 들고 공포스러웠어.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만 같고 내가 나를 어떻게 통제하지 못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무섭더라구. 바로 그때 너한테 전화가 왔어. 난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서 전화를 받았던 것 같아. 마음은 급했어. 벨이 끊기기 전에 받고 싶었거든. 전화를 걸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말야.


  간신히 그렇게 전화를 받고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서서히 그 느낌이 사라지더라고. 네 전화가 얼음땡처럼 날 녹인 거지. 정말? 나 소름이 돋았어. 난 얼음이 녹았던 얘기를 하는데 친구는 소름이 돋는단다. 지나서 생각해보니까 그게 공황장애 증상이더라. 요새 연예인들이 많이 고백하잖아. 공황장애를 앓았다고 말이야.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았지 뭐야. 그래도 그 후로 그런 증상은 없었어. 그랬구나. 다행이다. 친구는 차분하게 대답한다. 나는 그게 고맙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전화 한 통만으로도 서로의 일상에 귀기울이는 관계. 게다가 우연이더라도 친구의 상황을 읽는 꿈을 꾸고 친구를 돕기까지 하는 그런 특별한 순간.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도울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 어쩌면 기록하지 않아서 그렇지 매일 매일이 그런 특별한 순간들로 채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록하기로 한다. 내 일상에 엮인 나와 너의 관계. 나와 타인의 관계. 비밀이 가득한 숲속을 아직은 멀찌감치 서서 보고 있다. 숲 밖에서. 친구야. 우리 숲으로 들어가자. 그래. 친구는 역시 차분하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또 웃겠지. 자신 있어. 너와 얘기하며 웃는 건.



2016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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