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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in Mar 13. 2024

이렇게 살아도 되나? 결론부터 말하면, 네!

중심잡기 프로젝트00



“이렇게 살아도 되나?”

제일 많이 시달리는 생각이다.

불안은 평상시 차곡차곡 쌓인다.

나 같은 경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와서는 특히 그렇다.

내가 만난 그들이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해 대단한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 위화감을 조성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나는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는 “보통“과 ”정상“에 한참 벗어나 있다.

나는 현재 30대 중반이지만,

-결혼에 관심이 없고,

-”나“ 자신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몰두해 있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방식들을 고민한다.





행복이란 것은 환상에 빠진 상태라고 혹자는 말한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에서는 희망, 행복의 개념을 그저 환상과 같은, 희망에 빠진 회피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 말이 꽤 옳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의 하루는 밥 먹고, 일하고, 씻고 돌아와 잠을 자고 다시 일하러 간다.

그리고 사이사이 걱정이 끼어든다.

돈 걱정, 주변 사람(가족, 애인, 친구) 걱정 등.

결코 행복한 상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우리 만의 고유한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인간은 수많은 조각들로 구성돼 있다.

유년시절 부모님과의 관계,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 개인적 기질, 교육, 어릴 때 본 만화책이나 대학 전공 등.

개개인은 너무 다른 개체들이다.

타인이 갖고 있는 삶의 목표나 의미가 온전히 나와 들어맞을 수가 없다.

제 아무리 성자의 말씀이라도, 명석한 석학의 논리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정하고 스스로 부여해야만 한다.

그래야 만족의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다.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똑바로 봐야 한다.

내면의 못난 모습을 회피하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토양의 식생을 살피는 고고학자처럼 객관적으로 감정 없이.

그것이 바로 시작이다.


나부터 시작하자면, 겉보기에 둥글어 보이지만, 실상 예민하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그런 예민함을 표출할 수 없다.

완벽하고 싶지만, 완벽하지 못하고, 부지런하고 싶지만, 게으르다.

고등학교 시절 상위권 범주 중의 맨 끝자락에 있었고, 일등을 해 본 적이 없다.  

한 가지를 특출 나게 잘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어중간하게 처리하는, 보통 수준의 능력치를 보인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들이 그냥 괜찮다.

그냥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괜찮음은 거드름을 피우는 마음이 아니라,

‘ 그래, 내가 원래 이런 데 네가 어쩔래? ’

라는 꽤 양아치스러운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위와 같은 대사가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것은

살을 에는 비교 속에도 인간은 결국 나라는 고유한 존재는 ”지키고 “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난 대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삶의 방식을 찾고자 하는 개척자적  정신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지키자. 스스로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내 삶의 정의를 찾아보자. 그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진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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