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자의 자기고백 01
최근 어떤 소설가의 단편소설집을 읽는 중이다.
단편 하나, 하나를 아껴가며 읽을 정도로 매우 몰입해 있는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해 검색창에 작가 이름을 쳤다.
그러다 나는 다소 충격적인 평을 읽게 되었는데,
“소외층을 대변하려는 강박(?)을 버리면 더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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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창작하게 되면, 밝기만 한 글을 쓰기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이야기라는 구조적 생리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서사, 인물, 배경(시공간적)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서사는 흔히 사건과 갈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서사를 만들며 사건과 갈등을 설계할 때, 인물의 성격과 결핍을 맞물리게 세팅해야 한다.
인간이 갈등할 때, 필연적으로 내면적 결핍이 극대화된다.
인물은 비겁할 수도 있고, 우유부단할 수도 있으며, 저열한 욕망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면들은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을 부분이지만,
소위 말해 양지의 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아이언맨 같은 영웅적 인물의 면모는 결코 아니다.
이런 부분이 소외층을 대변하려는 강박이라고 읽힌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이유가 있다면,
그건 인간사에서 분명히 존재하나
결코 다루어지지 않는 "어떤 사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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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으로 잘 알려진 존 롤즈의 “무지의 베일”은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만하다.
무지의 베일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 어떤 계급에 속하고, 어느 정도의 부를 소유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회적, 정치적 배경 및 조건을 선택한다면, 최저 계급에게 유리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개념이다.
이 공리주의적 사상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최저계급에게 유리한 선택을 한다는 주장보다, “우리가 어떤 계급에 속하고 어떤 부를 소유하게 될지 모른다면”에 있다.
이 전제는 많은 부분을 함의한다.
인간은 자신이 사회에서 보통의 기준에 속한다고 주로 생각하지만,
엄정한 보통의 잣대를 만나다 보면 조금 주춤한다.
그 이유는 인간을 설명하고 구성하는 요소가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정말 다양하다.
부, 관계, 취향, 성격, 가정환경, 정체성, 가치관 등등.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특이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영역이 인간에게는 있기 마련이다.
그 한 요소가 인간을 순식간에 소수자로 만들 수 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수많은 삶의 양태가 실은 발생하고, 발생할 수 있음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 행위는 결국, 앞서 말한 “인간사의 사각”을 조망하고 양지화하려는 작업인 것이다.
정세랑 작가는 유퀴즈온더블럭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굳이 왜 천 번을 살아야 할까?
아마 인간에게 펼쳐질 수밖에 없는,
혹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읽는 행위는 결국,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포용력을 넓히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각에 놓일 수 있다.
그 어둠에서 혼자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도대체 이 어둠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때로는 알 수 없다.
이 사각들이 누군가의 목소리로, 이야기로, 영화로 조망돼
많은 이름이 붙을수록 조금 더 살기 평안한 사회가 된다.
이것이 아마 문학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