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애도를 떠올리다.
세상이 정해둔 시점보다 많이 늦었다며 드디어 짝을 만난 조카를 고모는 많이 좋아하셨다. 일흔이 훌쩍 넘고, 절뚝거리는 다리에 조카사위될 이와 기분 좋게 물회 한 그릇 시원히 드셨다. 10년 전 여름휴가 장면이다.
작년 고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아빠는 많이 슬퍼했다. 5남매 중 유일하게 남은 나이차 많던 누님이었는데. 장례식장엔 윤정부의 먼 한 자리 할 뻔했다며 으스대던 사위가 아빠 앞에서 싱글 웃어댔다. 고모가 해 준 기억에 남은 찜닭이... 물회의 추억이 훼손되는 기분이었다. 내 기분은 이랬는데 아빠도 못지않게 당황하는 듯했다.
그전엔 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있었다. 사촌을은 사인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세상을 떠났다고만 했다. 선산을 두고도 왜 일가친척이 화장장에 있어야 하는지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스산한 마음을 달랬다. 급히 모신 한 사찰의 스님이 큰 아버지의 이름 석자 제대로 읊지 못하며 제 지냈다며 아빠는 내내 못마땅해했다. 나중에 “삼촌. 섣부른 판단을 내려 너무 죄송했다”며 인사 왔다 하지만 내내 별말 못 하고 서성였던 아빠의 무거운 마음이 느껴졌던 장례식이었다.
초등학교 때 시골집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초상에 이웃집 사람들이 먼 시골까지 찾아주었다. 응당 고마워해야 마땅한데, 할머니 시신을 둔 병풍 앞에서 고스톱 치며 신나 하던 그들의 애도가 못마땅했다. 지금도 지각없는 이들이다 싶다. 아빠말 대로 전을 부치고 고깃국을 끓여대고 손님이 북적이니 잔칫집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노모의 죽음에 막내아들인 아빠는 그날만은 형과 형수님 앞에 한 마디 했다. “상” 등이라도 달아야 잔칫집 아닌 줄 알겠다고!
동해 물과 백두산~ 애국가에 나올 법한 첩첩산이 내다보이는 선산에 할머니 산소를 쓰고, 햇살이 따스히 비치고 제 지낸 떡을 나눠먹자 그제야 아빠는 “호상이다 “ 말했다. “오늘 밤은 가야지”라며 머리 곱게 만지고, 방청소 깨끗이 하고 몸 똑바로 잠들고는 담날 해가 밝으면 원망했다는 생전 할머니의 얘기가 떠오르며 나도 “잘 가시는 구나! ”했었다. 참 정갈하고 기억에 남는 떠남에었다.
“어디에다 묻었어요? 아가씨” 배가 불러 병원갔던 새언니는 그렇게 아이를 잃고 내 방에 돌아왔다. 조카를 받아 떠나보낸 간호사인 내 사촌언니 (새언니에겐 아가씨)에게 조심스레 묻는 걸 잠결에 그만 들어버렸다. ”오빠가 나중에 말해줄 거예요“. 했지만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말을 잃은 사촌오빠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게 되었다.
애도하지 못한 죽음. 이름 붙이지도 않고 떠나보낸 죽음에 애도에 대해 책을 읽으며 새삼 걱정했다. 나는 반올림 활동을 하며 너무 젊은 나이에,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대기업을 상대로 직업병이라 따지는 건 버거운 일이라 마음에 묻기로 한 죽음들을 많이 접한다. 그럴 땐 추모 성명을 내 개인의 죽음이 아닌, 사회적인 죽음임을 많은 이들이 알게 하고 애도한다. 그렇게 드러나서 부담스러운 이도 있겠지만 제대로 애도한다 고마워하는 유족이 대다수다.
반올림 자원활동가 오렌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들이 장례비용을 모았고 추모제를 열었고 10년이 된 지금까지 연화장을 찾아 오렌지가 좋아한 피자 콜라 아이스아메리카를 나눠먹으며 그때의 오렌지를 추억한다.
장례지도사의 인터뷰로 시작해 어떤 마음으로 어떤 노동을 하는지 담은 책 <죽은 다음> 은 장례가 외주화 되고 이벤트가 되어버린 현재를 문제다! 라고 고발하기보단 나의 애도를 우리의 장례를 생각게 한다.
그렇게 꺼내본 아빠를 주변으로 꼽아봤는데... 엄마는 조금 힘들 것 같다. 그저 엄마가 좋아하는 텃밭에서 새벽녘 무섬증이 나다가도 저 멀리 어슴프레 밝아지는 아침 녘에 절로 노래가 나온다는... 얘길 행복하게 하던 엄마의 표정, 목소리, 떨림이
갑작스럽고 너무나 이른 나이에 연속으로 겪은 죽음에 압도되었던 지난 날의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자기만의 애도가 아니었을지, 애(사랑) 이 아니었을지 넘겨짚어볼 뿐이다.
다음이 떠오르지만 나 또한 더이상은 두려워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