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낙엽이 지고, 공기에는 겨울의 냄새가 스미는 듯하다. 자연은 다음 해를 위한 숨 고르기에 들어간 듯하다. 아마 겨울이란, 생명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잠시 멈추는 시간일 것이다.
시골집 마당에는 낙엽이 가득하고, 까치밥으로 남은 감이 몇 알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그래,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간다.
자연에는 항상 여유공간이 있다. 나무는 가지를 비워두고, 강은 범람을 위한 둔치를 남겨둔다.
사람도 그렇다. 여유가 있을 때 타인에게 더 관대해지고, 자신에게도 덜 가혹해진다.
나는 그 사실을 자연에서만이 아니라, 남편과 나의 지난 세월, 그리고 부모님을 통해 배웠다.
왜 그렇게 효율만을 좇고, 성장만을 위해 달렸던가, 그 끝이 결국 병과 지침이었다니.
이제는 미움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그들이 냉정했던 것은, 아마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사고가 얕고, 패턴이 반복되는 것도 결국 여유의 부재 때문이었다.
가난과 결핍은 인지적 대역폭을 줄인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근시안적이고, 즉흥적인 만족을 좇게 된다. 그래, 우리에게는 그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생존의 언어로 살아왔다. 제한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더 빼앗기지 않기 위해 효율에 매달렸던 것이다.
계절이 바뀌듯, 이제 어느덧 내 인생의 가을이 찾아왔다.
그리고 남편이 아프게 되니, 이젠 굳이 더 달릴 필요가 없음을, 멈춤이야말로 다음을 위한 시작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인생의 여백을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그 여백 속에서 새로운 연결과 통찰이 자라날 것이다. 자연이 겨울의 동면을 통해 봄을 준비하듯, 나는 지금의 고통과 아픔을 기회 삼아 더 편안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동물들의 동면이 가혹한 경쟁과 노동으로부터 풀려나는 따뜻한 시간인 것처럼, 나도 지금의 여백을 통해 삶 자체의 아름다움과 온기를 느끼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 집 감나무처럼 익어가겠지.
내 생각과 행동도 세월과 함께 조금씩 물들어가겠지.
가을 하다 - 이어령
단풍이 든다는 것은 곧 겨울의 죽음이 다가온다는 슬픈 신호다. 가을의 영광에는 서리가 있고, 단풍이 든 빨갛고 노란 극채색의 화사 속에서 검은 고목의 가지가 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한 몸이 되는 계절, 가을.
이 가을은 시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계절의 언어는 명사로 끝나지만 가을만은 그대로 동사로 쓰이기도 한다. '가을 하다'는 말이 그렇지 않은가. 거두어들이는 것. 들판에 있는 것을 나의 곳간으로, 항아리로 거두어들이는 일.
그렇게 나는 오늘도 잠시 멈추어,
내 안의 계절이 가을하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