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으로 돌아온 지방 사람
혼자 서울에 살 때보다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작은 일에도 짜증이나 분노,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이 밀려오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니 우선 사람이 넘치는 출퇴근길을 겪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도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편의점 음식을 끊고 매일 신선한 음식을 먹는다. 퇴근 후 집에서 가족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다. 굳이 약점을 꼽자면 적게 버는 돈이다. 하지만 삶의 큰 타격은 없다. 부모님 집에 함께 살며 정해진 생활비를 내고 함께 집안일을 거들며 식비와 주거비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잠잘 때도 돈이 나가는 서울 생활에 비해 ‘생존을 위한 지출’이 적은 것도 크다. 얼마 전 책에서 이런 문장을 봤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인간은 타인의 눈길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데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 이 생활이 가능한 이유는 ‘타인의 눈길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것을 스스로 멈췄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활이란 지방이 고향인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사람은 자랄수록 더 넓은 세상을 겪고 더 높은 자리를 좇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오히려 거꾸로 되었다. 비교적 일찍 시작한 타향살이에서 겪은 몇 번의 회사 생활 실패, 사랑의 실패, 우정의 실패… 같은 경험이 나를 그런 지옥으로부터 일찌감치 해방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하고 좌절하며 한계를 떠올릴 때 수많은 감정이 스쳤다. 외로움도 있었고 자책과 원망, 때로는 분노와 무기력함도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 모든 것이 실은 타인의 눈길을 지나치게 의식해 생긴 것이 대부분임을 깨달았다. 오래도록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익명의 사회가 만든 평균이자 표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다. 무리에 섞여 살기 위해서는 결코 타인의 시선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할 수 있다. 가령, 내가 정한 범위는 타인의 불쾌감을 느낄 정도의 위생 상태 불량과 타인의 성취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손실 끼침이다. 이것만 아니라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저마다의 방향과 어울림, 인생의 속도가 있다. 실력과 운이 좋아 빠른 속도로 큰 성취를 한 사람도 있고 실패보다 성공이 더 잦은 사람도 있고 조금 더 유리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애써 의식할 필요는 없다. 앞에서도 썼듯, 내 삶의 중심은 익명이 만든 평균이나 표준이 아니라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일수록 스스로가 생각하는 만족의 기준을 고민하는 것이 낫다. 이런 만족의 기준은 삶, 진로, 꿈, 인간관계 같이 여러 영역에 세울 수 있다. ‘타인보다 혹은 타인만큼 잘해야지’가 아니라 내가 정한 기준에서 세계를 구축하고 생활을 꾸리는 것이야말로 조금 더 쾌적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평생 지속 할 수 있는 직업(‘일’과는 다르다)을 갖지 않았고 무언가를 크게 벌일 정도의 돈도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진 기준만큼은 분명 뚜렷하다. 되도록 자연과 가까이 살고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살기, 여러 사람과 항상 어울리며 살기, 죽을 때까지 개선 가능한 사람이 되기, 물질 만능 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기, 앎의 기쁨을 자주 누리기, 내가 매일 잠드는 공간을 취향대로 가꾸며 살기, 세 번 더 생각하기, 시간의 유한을 인정하기, 오직 하기, 실패해도 다시 다독이며 스스로 일어나기, 스스로 계속 무언가를 하기.
나는 지금의 생활이 꽤 만족스럽다. 우선 그 뿐이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에서 계속 고민하지만 그렇다고 늘 조급하거나 불안에 몰두하지 않는다. 현재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