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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Nov 01. 2019

모두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다른 시간을 산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


아직 안 쓰인 A4용지 같은 시간이었다. 일정한 크기로 겹겹이 쌓인 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 더미는 그대로 나의 일상 같았다. 평일엔 걸어서 통근했고 듣는 음악의 장르는 매번 비슷했으며 매일 먹는 반찬은 계란프라이였다. 변하는 건 날짜와 요일, 계절과 날씨였고 손톱과 머리칼의 길이였으며 어제 쇼핑몰에서 본 옷의 가격이었다.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그런 것들만이 무지(無地)의 일상에 옅은 색칠을 했다. 겨우 이런 것만이 단조로운 시간을 깨뜨린다는 생각이 멈춘 건, 갑자기 찾아온 어떤 감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일상을 다르게 보게 했다. 


일 때문에 오랜만에 찾은 서울 청계천이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평평한 외관과 높은 층수를 가진 빌딩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빌딩을 감싼 수많은 창문과 해가 마주하자 내 눈에도 매끄러운 햇빛이 스며들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저 수많은 빌딩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하는. 어제 헤어져서 우울한 사람 옆에 다음 주면 결혼하는 사람이 있고 그 위로 이뤄지면 안 될 사랑을 하거나 며칠 후에 끝내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릴 사람이 뒤섞인 공간. 그저 몸이라는 형태에 갇힌 사람들이 감정을 갖고 세계를 만들어내는, 그렇게 만든 이야기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도시를 지탱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은 모두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다른 시간을 산다. 그래서 같은 풍경을 보고도 다른 말을 하고, 같은 시간을 살면서 다른 상황을 마주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어떤 감정을 다시 만났을 때 나의 시계는 이전과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난 시간이 불룩 튀어 올랐다. 몇 해 전에 코알라 주유소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앉아 방금 본 한강을 떠올리다 핑글 돈 눈물이라던가, 서로에게 공통점이 없어 더 할 말을 찾을 수 없던 순간 같은 것들이… 또 이런 상황을 찍어낸 듯한 순간 또 순간이 아무 순서 없이 차올랐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한 사람에게 일기장에 글을 쓰듯이 후회와 바람을,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한동안 쓰이지 않은 A4용지 같은 시간 위로 비로소 글자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에 살았지만 서로 다른 순간을 살던 존재가 같은 시계를 보기 시작한 지점에 ‘다시’ 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시간대가 하나의 시간대로 합쳐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열 번도 넘게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봤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인 “미래에서 기다릴게”를 듣고 또 들었다. 수 십, 수 천 만 명이 동시에 떠도는 도시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몇이나 될까. 너와 내가 만나 살아온 삶을 얘기하며 울고 웃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영화 대사처럼, 사람들은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한 명쯤 가슴 속에 품고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나지게 된 사람이 서로 인사한다. ‘새로운 만남도 사실은 이별’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만남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또 경외심과 함께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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