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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코크 Oct 28. 2020

아둥바둥 흙수저 탈출기 (3) – 호주 워킹홀리데이

라떼는 말이야

아둥바둥 흙수저 탈출기 (3) – 호주 워킹홀리데이 썰 라떼는 말이야.


(이번에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겪은 일에 대한 썰을 풀어볼까 합니다. 이때의 경험들은 고생은 많이 했어도 영어 실력도 늘려줬고 훗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민이나 갈까?’ 따위의 생각을 안 하고 착실히 맘 잡고 일하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나의 첫 해외생활, 호주 워킹홀리데이


2년 남짓한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23살에 학교로 돌아왔다. 난 군대 물이 다소 덜 빠진 칼복 학생이 되었고 1년 동안 서툴렀지만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1년간 학교생활, 영어공부, 아르바이트를 병행한 덕에 외국인 울렁증 정도는 겨우 없앨 수 있었고 알바로 모든 돈으로 필리핀 3개월의 어학연수를 거쳐 호주로 가게 된다. (2편에서도 적었지만 군대 제대 후 쳤던 나의 토익 점수는 200점대 후반이었다. 나의 발 사이즈를 겨우 넘긴 점수였고 간단한 문장도 해석하지 못했다)


필리핀 3개월은 영어공부에 집중해서 생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고 덕분에 호주에 갈 때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잔뜩 붙은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땐 무슨 오기였는지 남들과 똑같은 워킹홀리데이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케언즈라는 휴양지를 첫 도시로 정하고 호주 입국을 했다. 케언즈는 사람이 적고 한국인도 상대적으로 적어서였다. 홍콩과 시드니를 경유해 도착한 케언즈 공항에는 한국인은커녕 동양인 자체가 거의 없었다. 워킹홀리데이는 맨땅에 헤딩하는 거란 생각에 숙소 예약도 하지 않고 공항에 도착했으나 막상 입국장에 나오니 막막했다. 배낭 하나 메고 서있으는 영어 서툰 아시아 청년에게는 호주의 첫인상은 설렘보다는 이제 현실이구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좀 더 앞섰다.


한국에서 워홀을 준비할 때는 그냥 가서 부딪히면서 1년 뒤엔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는 나를 상상했는데 말이다. ㅎㅎㅎ



조용했던 케언즈 공항


케언즈 공항은 옛날의 제주공항 같은 작은 단층 건물로 기억한다. 입국장에선 백패커 무료전화들이 모여 있었고 광고를 보고 원하는 곳을 골라 전화를 걸어 예약과 픽업 요청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지금 검색해보니 그 백패커 전화기는 안 보이는 걸로 봐서는 요즘은 많이 바뀐 것 같다. 물론 그 당시는 스마트폰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백패커 (게스트하우스) 광고를 훑어보고 하루에 20불도 안 되는 제일 싼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호주 여성 직원의 호주 특유의 발음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겨우 준비한 문장, “공항인데 픽업해줄 수 있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화를 받던 호주 아가씨의 말을 못 알아들어 “Pardon? 뭐라고요?”만 반복했고 어찌어찌 눈치로 버스를 타고 영수증 끊어오면 그 돈을 돌려주겠다는 것을 두 번이나 통화하고선 알아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이 정도 영어도 못 알아듣는데 여기서 일은 어떻게 할까? 하는 막막함도 들었고, 혹시 길을 읽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사히 숙소에 잘 도착했다.

2층 침대가 9개가 있는 18인실 도미토리. 하룻밤에 2만 원이 채 하지 않는 저렴이 백패커, 그게 나의 첫 숙소였다. (물론 남녀 혼숙이다….)


젊은 남녀가 한 방에서 여러 침대에서 자는 것도 나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맞은편 침대의 끝자락, 하얀 침대 시트 사이로 삐져나온 남녀가 뒤엉켜있는 발바닥 4개.

아, 내가 호주에 와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준 날이었다.




돈이 떨어져 간다…


호주에 갈 때 환전해간 돈은 백만 원이 좀 넘는 금액으로 나의 전 재산이었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압박에 첫날 마트에서 산 것은 식빵, 딸기잼, 우유였다. 식료품 가격이 저렴해서 5천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이렇게 사면 2박 3일 동안 먹을 수 있었다.


같은 숙소에서 오가며 안면을 튼 한국인들에게 일자리 정보를 물어봤지만 케언즈에서 일을 구하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였다. 수소문 끝에 번다버그란 곳에 가면 숙소에서 농장일 알선도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며칠 후 번다버그로 이동했다. 케언즈에서 번다버그 까지는 약 1300Km의 거리라 기차를 타고도 24시간 넘게 가야 하는데 그때도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나라의 일반석 기차 같은 앉아서 가는 좌석 (제일 싼 거)을 타고 24시간을 넘게 이동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궁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만…)


케언즈에 왔으니 액티비티는 해보자는 생각에 번지점프도 거금 200불을 넘게 주고 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호주에서 돈을 쓴 것 중 가장 잘 한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자리를 못 잡고 숙식비, 교통비 등으로 나중에 돈이 떨어져 수중에는 300불 남짓 남아서 쪼들리긴 했지만 말이다.


번다버그로 이동할 때도 숙소 예약 없이 무작정 그냥 갔다. 번다버그 기차역에 내리고 나서는 무거운 100리터짜리 배낭을 메고선 방을 못 구해 동네를 빙빙 돌았던 기억이 난다. 어찌어찌 숙소를 잡게 되었고 숙소에서 알선해준 농장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은 시작되었다.


번다버그에선 주로 캡시큠 (피망), 그레이프 토마토(방울토마토 종류) 같은 농장에서 일했는데 방값 내고 밥해먹고 나면 그리 큰돈은 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계획했던 대로 9개월간 일을 해서 번 돈으로 3개월 호주 어학연수는 어려워 보였다. 토마토나 따다간 큰돈 벌기 어렵겠단 생각에 또다시 다른 도시로 이동을 고민하였고 지인을 통해 그리피스라는 도시에 일자리를 소개받기로 하고 한 달 채우지 못한 번다버그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려던 찰나 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호주에서 만난 한국인 아저씨


번다버그에 갔을 때 난 호주에 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뉴비였고 머물던 숙소에는 역시나 한국인이 없었다.

어느 날 짙은 새벽, 어김없이 농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고 같은 숙소에서 처음 보는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탑승하였는데 그의 외투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ZPZG”



아재들은 기억을 할 것이다. 90년대 후반, 한국에 신토불이 브랜드 돌풍을 일으켰던 잠뱅이, 쌈지와 함께 뜬 브랜드 “지피지기”였던 것이다. 그는 늘 혼자 다녔으며 다른 외국인과 말을 섞는 것도 잘 못 봤는데 영어를 유창하게 했기에 그 지피지기 점퍼가 아니었다면 한국인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 아저씨는 매일 오후 숙소에 사람이 없을 시간에는 다이닝룸에서 책을 들고 공부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숙소의 유일한 한국인이니 난 음식도 건네면서 말을 붙여보기도 했지만 타지에서 내가 만났던 여행자들과 달리 대화에도 적극적이지 않고 조용하여서 더 이상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와는 그렇게 데면데면 지내다가 그 숙소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 그래도 인사를 해야겠다 싶어서 “저 내일 여기 떠나요”하고 인사를 하였고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그리피스”라는 곳으로 간다고 했더니 대뜸 자기가 그리피스 출신이라는 것이다! 시드니에서도 버스로 10시간을 가야 하는 그 촌구석 출신을 번다버그에서 만날 줄이야! 호주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던 나는 잘됐다 싶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그분은 맥주나 한잔 하자며 같이 리퀴드 샵(주류 판매점)에서 맥주를 사 와서 그 분과 긴 얘기를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한국에서 보석 세공업을 하다가 호주로 기술이민을 온 지 5년이 된 영주권자였다. 그리피스에서 자리 잡고 지내다가 지금은 호주투어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호주 전국을 다녀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해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도 모셔와서 살 거라는 그의 계획이 부럽기도 했고 딴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호주 영주권만 있으면 TAFE(테잎. 전문학교)에서 원하는 공부도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고 임금도 높다 보니 한국보다 삶의 질이 훨씬 높아 보였다.


아저씨는 그리피스에서 정착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 정보도 주었다. 그리피스에 가면 치킨팩토리(닭공장)가 있는데 그곳에 대우도 좋고 안정적이니 꼭 거기에서 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24살이었고 그 아저씨는 35살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 아저씨로 느껴졌는데 지금 난 30대 후반이 되었으니 20대 친구들도 날 아저씨로 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ㅋ)


닭공장 찾아 삼만리


번다버그에서 한참을 걸려 시드니로 갔고 다시 그리피스까지 버스로 10시간을 달렸다.


그리피스에 도착 후 한 달이 넘도록 만나는 사람마다 여기 치킨팩토리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일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예전에 누군가가 우리나라 직업소개소에 해당하는 Job agency를 통해서 일을 구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잡 에이전시를 찾아다니며 치킨팩토리에 대해 물었고 마침내 그 회사 채용 대행을 하는 업체를 찾아서 지원하게 되었다.


영어로 된 입사 지원서 같은 서류를 작성하라고 줬는데 각 공정별 모집으로 보였고 잘 모르겠으니 대충 1 지망, 2 지망 같은 것을 체크해서 냈으나 소식은 없었다. 한 1~2주 지났으려나? 호박 농장에서 허리가 끊어지게 호박을 따고 있는데 (참고로 호박이 20Kg가 넘는 엄청 큰 호박이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용은 여기는 치킨회사인데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내일 올 수 있냐는 것….


한국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인터뷰(면접)를 보러 그 공장에 찾아갔더니 나이가 지긋한 백발 중년 여인이 오피스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인사 담당관 같은 포지션이었던 것 같다.

몇 가지 질문을 받았고 어떤 서류를 주면서 읽어보라고 시키고선 무슨 뜻인 것 같냐고 물었는데 아마도 내가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지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짧은 영어였지만 통과가 되었는지 “넌 디본 쉬프트(De-bone Shift)에서 근무를 하게 될 것인데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고 난 디본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영어 못한다고 생각할까 봐 그냥 무작정 좋다고 했다. (그토록 찾던 안정적인 일자리였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랴… 닭 모가지 내려치는 것만 안 시킨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선 네가 일할 곳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작업장을 보여줬는데 거대한 공장에서 수십 명이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생닭을 자르는 것 같아 보였다. (살아있는 닭이 아니라 도축되어 몸통만 남은 닭...)


(이곳이다)

그때 일했던 공장 이름은 Batter 라는 치킨 브랜드로 기억하는데 구글링 해보니 Baiada Poultry로 바뀐것 같다. Baiada가 Batter을 인수한 것 같다.
사모아나 뉴질랜드 출신 사람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컸다


뭐가 되었든 땡볕에서 흙먼지 안 마시고 주 5일 안정적인 일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했고 입사를 하고선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다.


입사 첫날 하루 종일 교육이었다. 대략 3~40명 정도였는데 외국인은 나 혼자로 보였다. 아시아인이 나 혼자다 보니 더욱 위축이 되었는데 난생처음 오리지널 원어민들이 하는 영어로 진행된 교육에서 또 멘붕이 왔다. 내용은 위생/안전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뭐 그리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으나 영어로 진행된 덕에 반도 알아듣지 못하였고 눈치로 겨우 따라갔었다.


이날 교육은 처음으로 받아본 영어 진행 교육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느낄 수 없었던 피교육생들의 적극성이었다. 수줍은 아시아인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강사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들고일어나서 발표를 하는 모습. 발표하면 선물 주는 것도 아닌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할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다른 문화의 경험이 생각을 바꿔준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또 하나의 뚜렷한 기억이다.



외국인 노동자


디본 쉬프트는 알고 보니 De-bone을 말하는 거였다. 카페인 없는 커피를 디(de) 카페인 커피라고 하듯. 닭의 몸통에서 뼈를 발라 닭가슴살만 도려내는 공정을 De-born이리고 불렀던 것이다.


하루 종일 왼손은 닭가슴살을 떼어내고 오른손은 칼이나 가위를 잡고 있으니 첫 1~2달 동안은 손이 아파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다. 그리고 일은 새벽 6시에 시작해서 오후 3시면 끝났으니




어찌나 힘들었는지 숙소로 돌아오면 밥 두 그릇은 비워내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영어였다. 공장은 웅웅 거리는 소음이 가득해 귀마개를 착용해야 했고 일을 하고 있으면 슈퍼바이저가 와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가는데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도 않는 데다 영어도 짧다 보니 눈치로 알아듣고 움직여야 했다.


인간의 적응을 참 잘하는 동물인지 그곳에서도 그럭저럭 적응을 하게 되었고 일이 손에 익어갈 때쯤 슈퍼바이저는 나에게 작업 후 30분 연장근무를 하는 청소일을 하겠냐고 기회를 줬고 그 연장근무는 1.5배의 시급을 주었기에 감사히 하게 되었다.

날 좋게 보았는지 내가 그만두려고 할 때쯤 캐주얼(일종의 비정규직)에서 퍼머넌트(정규직)로 전환하겠느냐는 오퍼도 받았으나 평생 닭공장에서 일할 생각은 없어서 떠나게 되었다.




호주에서 얻었던 것.


그리 길지 않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나의 계획과는 좀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하던 나에게 값진 경험을 얻게 해준 시간 이었다.


첫째,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호주에 갈때만 해도 호주달러 천불을 가지고 갔고, 아는사람 한명도 없는 호주에 가서 직접 숙소를 알아보고 새로운 일을 해보고 사람을 사귀면서 새로운 환경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살아가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 일을 하며 모은 돈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온 당분간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말이다 ㅎㅎ


둘째, 영어실력,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크다.

호주로 갈 계획을 마음 먹었을 땐, 돈도 벌고,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다니며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생각이었지만. 결국은 돈도 크게 못벌었고 여행도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영어는 유창하게는 아니더라도 울렁증을 완벽히 없애고 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호주를 갈 때 한가지 다짐을 했던 것이 한국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다니지 않겠다 였다. 일부러 한국인을 피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한국인만 있는 커뮤니티에 있고 싶어하진 않았다. 호주에 일년을 다녀왔어도 영어 회화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없는 곳에 일을 해본 경험은 나에게 최소한의 ‘눈치영어’ 실력을 키워주었고, 외국인들과 파티도 하고 술도 마셔보면서 자연스레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줄인 것이 성취라고 생각이 되었다.


셋째, 외국인과의 삶에서 생긴 경험


호주를 가기 전엔 나의 외국 경험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필리핀 연수 3개월이 전부 였다.

하지만 호주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20대 초반의 청년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학교친구, 동네친구, 혹은 군대 선후배가 전부였는데 넓은 세상에 나와보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풋폴(럭비) 선수를 하다가 여행 중인 뉴질랜드인, 미국 5년 유학 경험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하던 일본인,  간호사를 하고 그만 두고 여행 온 한국인 누나, 이렇게 여행 온 사람을 상대로 쉐어 하우스를 운영해 돈을 벌던 호주인, 회계사로 기술 이민을 왔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나와 같이 치킨팩토리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오렌지 농장에서 알바를 하던 인도에서 온 형, 일년에 한번쎄 6주의 휴가를 내고 외국 산으로 트랙킹을 다니는 노르웨이에서 온 누나 (이 분이랑은 타즈매니아 크래들 마운틴 트래킹 중에서 만났는데 3일동안 같이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었고 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이 당시 찍었던 사진들은 모두 싸이월드에 저장이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날라가버렸더라… 지못미 싸이월드 ㅠㅠ


아쉬웠던 호주 워킹홀리데이 (다시 돌아간다면...)


반면 호주에 생활에서 아쉬움도 역시나 남았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니 아쉬웠다는 것인데 혹시나 호주에 가기 전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호주 생활에서 후회되었던 점


첫째,.호주에서 번 돈을 다 쓰고 오지 못한 점  


이 부분이 가장가장 아쉽다.

내 기억에 5백만원이 넘는 돈을 모았었는데 이 돈으로 여행을 실컷 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드니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 당시 한국돈으로 60~70만원이 든다고 하여 돈이 아깝단 생각에 못해보았는데 너무너무 후회가 된다. 그 당시 60~70만원이면 나에겐 엄청 큰 돈이 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보면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큰 경험이 아닐까...

해변에서 카이트보드(대형 연을 달고 타는 보드)를 타는 모습에 반해 배우고 싶었지만 최소 장비 비용이 1500불이 들어간다는 말이 또 마음을 접고, 여행도 최소한도로만 했었다. 마음에 여유가 좀 생기고 나니 만약 그 때 벌었던 돈으로 경험을 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난 호주를 다시 가보지 못했다.

(타즈매니아 섬에서 4박5일 트랙킹 한게 유일한 여행 다운 여행이었다)


둘째, 자료와 사진 보관을 못한 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15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서 쓰고 있다. 사진은 다들 어디갔는지 모르겠고 그때의 나의 감정과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 해놓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 하나로도 좋은 컨텐츠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글을 쓰면서도 사진이 어디 없을 까 뒤져 봤지만 당시 찍었던 사진 파일들은 전부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다. 싸이월드가 없어질 줄이야... 그 당시는 페이스북도 없었고 외국인 친구를 만나도 이메일 주소 교환하는게 전부였는데 태반이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셋째, 호주에서 해볼 수 있는 사업에 도전을 해봤다면…

학창시절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으나 늘 생각만하고 실천을 하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갔었지만 수완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사업이 참 많았을 것 같다.

집을 하나 빌려서 쉐어 하우스를 운영해도 좋았을 것 같고 한국에서 팬시문구를 수입해다가 팔아도 좋았을 것 같다. 사업 뿐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경험을 사려 하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물론 그때보다 좀 더 철이 들고 아는 게 많아지고 나니 드는 생각이다. 그레서 지금은 경험을 살 수 있는 것이면 여건이 되는한 해보려고 한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두서없이 썼습니다.

다음편에는 필리핀 생활,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의 변화들에 대해 적어보려고 합니다.




호주에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타즈매니아 크래들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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