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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트 Mar 01. 2020

my first espresso macchiato

나의 첫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베를린발 기차에서 배낭을 도난당했다. 괜찮다 생각해보려 애를 썼지만 배낭 안에 모든 사진들이 담긴 외장하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후에는 참 힘들었다. 배낭을 훔쳐간 도둑이 차라리 카메라를 가져갔더라면 이렇게 허무 할리 없었다. 남은 여행이 더 이상 기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더군다나 여행 초반에 고장 난 휴대폰 덕분에 나는 노트북과 종이지도, 유레일패스에만 의지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여행 시작부터 좋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여행지에서는 남의 집 빨래도 왠지 예쁘다. 베네치아의 남의 집 빨랫줄 

스위스를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 예약해두었던 에어비앤비로 가는 길을 꼼꼼히 확인했다. 물의 도시라 그런지 돌바닥과 작은 다리들이 많았고, 어렵사리 캐리어를 끌고 숙소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벨을 눌러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몇 분을 기다리다가 노트북을 꺼내어 들고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근처 친구 집에 와있다며 금방 가겠다는 답장이 왔다. 분명 도착시간을 미리 알려줬는데 왜 아직 친구 집에 있는 거야? 짜증이 잔뜩 났지만 저 멀리 달려오는 주인과 그의 친구들의 호들갑스러운 인사를 뿌리칠 만큼 뻔뻔하진 못했다.

 

멋진 털코트를 입은 Shero와 그의 유쾌한 친구들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Shero는 무거운 내 캐리어와 가방을 기꺼이 2층 방까지 옮겨주었다. 1층 부엌에 둘러앉아 친구들을 차례로 소개해주고는 마지막으로 본인을 소개했는데,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한국 영화의 Big Fan이라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으니 으레 하는 말이겠지 하며 그냥 웃어넘겼는데,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갑자기 본인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보여줬다.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한 김기덕 감독과 해맑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오? 빈말이 아니었네. (Shero는 <기생충>을 봤을까?) 그러고 보니 Shero가 입고 있는 무릎까지 오는 털코트도 뭔가 영화감독스러운 복장이었다. 코트가 멋지다고 칭찬을 해주니, 너도 한번 입게 해 주겠다며 굳이 내 패딩을 벗기고 코트를 어깨에 걸쳐줬다. 자, 이제 너도 영화감독 같아! 깔깔깔. 참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저 앞의 갈색 설탕 한 봉지를 넣어주면 magic..


갑자기 Shero 이탈리아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맛보게  주겠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아직 경계심을   없었던 나는, 혹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누군가  짐을 가져가지는 않을까 겁이나 재차 거절했다. 하지만  유쾌한 친구들은 나를 기어이 카페로 이끌었다. 테이블도 의자도 없는  작은 카페는 커피 향기로 가득했다. Shero 바리스타와 친밀한 인사를 나누고  위해 에스프레소 마키아토를   주문해줬다. 잠깐, 나는 에스프레소를 마셔본 적이 없는데? 당황하는 사이 조그마한 잔에 에스프레소와 우유 조금을 넣은 커피가 내어져 나왔다. Shero 갈색 설탕  봉지를 커피에 모두 털어 넣고 스푼으로 열심히 저었다. , 이제 이걸 한입에 마셔! 꿀꺽. 뭐야 이거 에스프레소 맞아? 진짜 달콤하고 진하고 맛있잖아? 눈이 커지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깔깔깔 웃었다. 거봐 내가 정말 맛있는 커피라고 말했잖아.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침마다 이런 카페에 서서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하루를 시작해. 아마 1분도  걸릴걸?


다음날 다시 찾은 카페. 정말 주문에서 원샷까지 1분 걸리는 사람들. 


Shero와 친구들 덕분에 베니스는 나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에스프레소를 처음 맛본 곳, 특별한 동행들을 만난 곳, 다시 열심히 여행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곳. 한국에 돌아와 종종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마키아토를 주문했다. 카페 직원들은 하나같이 같은 질문을 하곤 했다. 이거 카라멜 마끼아또랑은 다른 건데 괜찮으세요? Shero가 넣어주던 갈색설탕도 없었고 그 달콤하고 진한 맛은 더더욱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가격도 비쌌다! 베니스에서는 1유로 동전 하나면 충분했는데.


밤길이 어둡다며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베니스 동행들. 따뜻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어느 겨울밤. 


그리고 어제, 남자 친구와 산책을 하다가 그 동네에서 꽤나 '유서가 깊다는’ 한 카페에 들어갔다. 테이블마다 놓인 갈색 설탕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랜만에 에스프레소 마키아토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시도해본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중 가장 베니스의 맛과 비슷했다. 달콤하고 진하고 부드러웠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가끔은 나를 기억해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때를 추억할 수 있음에 왠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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