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48분에 온 메일에서 방향을 찾다
아동문학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내 마음은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했다. 방송작가로서의 경험이 있었지만, 아동문학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처음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날, 손끝은 떨렸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이제는 답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은 들떴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혹은 "저희 출판사와 출간 방향이 맞지 않습니다", "내년까지 모든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조금씩 달라진 피드백들이 이어졌다.
"재미있는 작품이었지만, 아쉽게도 저희 출판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인물들의 내면을 생생하게 표현하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추구하는 동화와는 결이 다릅니다."
"서술 방식이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출간 방향과는 맞지 않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은 원고였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말들이 이어졌지만, 결국 마지막은 늘 같았다.
"출판사의 색깔과 맞지 않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는 조금 더 구체적인 피드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여기는 이런 부분을 살리면 좋겠어요."
"캐릭터를 더 추가해 보세요."
"서술 방식을 바꿔보는 건 어떤가요?"
나는 각 출판사의 의견을 하나씩 받아들이며 수정하고 퇴고했다. 그러는 동안 작품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피드백이 내 글을 더 나아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출판사의 전문가적 판단을 신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혼란이 찾아왔다. 어떤 편집자는 내 글의 서술 방식이 매우 신선하고 매력적이라고 칭찬했다. 기획 구도와 캐릭터 설정도 훌륭하다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편집자는 똑같은 서술 방식 때문에 출간이 어렵다고 판단을 내렸다. 감정 표현, 캐릭터 입체성, 어휘 선택, 사건 구성 등 모든 부분에서 의견이 제각각이었다.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어? 이 편집자의 말에 따라 고치면 내 글의 진정성이 흐려지는 건 아닐까?"
"어? 하지만 또 다른 편집자는 여기 때문에 출간이 힘들다고 하는데?"
편집자마다 세계관과 독자층이 달라, 어느 말이 옳은지 도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답답함은 깊어져만 갔다.
▲새벽에 날아온 편집자의 진심새벽 3시48분, 내 글을 읽고 남겨준 편집자의 첫 한줄 ⓒ 이효진
그러던 중 뜻밖의 메일이 도착했다. 발송시각은 새벽 3시 48분, 나는 그날 오전에 확인했지만, 그 시간에 누군가 내 글을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솔직히 그 편집자도 다른 출판사들처럼 간단히 "출간 방향과 맞지 않습니다"라는 형식적인 답변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늦은 새벽, 아마도 피곤했을 그 시각에도 불구하고 내 글을 꼼꼼히 읽고 있었다. 그리고 명확히 짚어주었다. 그 출판사는 주로 초등 저·중학년용 책을 출간한다는 것. 그런데 내 원고는 초등 중·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는 것. 즉, 내 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독자 연령대가 맞지 않아 출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내게 거절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내 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자리가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른 출판사에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였다. 그 메일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신의 글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나는 깊이 감사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을 그것도 새벽 3시 48분이라는 시각에 정성껏 보내준 그 마음에. 그 순간, 혼란으로 뒤엉켰던 내 마음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방송작가로서 나는 팀을 이루어 PD, 진행자와 협력하며 이야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동문학 작가로서의 나는 달랐다. 혼자 원고를 완성해야 했고, 그 글이 출판사의 편집자들에게 선택받아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들의 선택까지 받아야 비로소 내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에 닿게 되는 것이다.
즉, 1차로는 출판사와 편집자의 선택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한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큰 과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편집자의 세계관과 독자층에 맞추어 의견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내 작품의 길과 색깔을 지키는 줄다리기가 필요하다.
이 과정은 쉽지 않다. 편집자들의 의견은 다르고, 독자들의 반응 역시 다양하다. 모든 의견을 맞추려면 작품의 진정성이 흐려지고, 그렇다고 무시한 채 나만의 길만 고집하면 출간의 문이 닫힐 수 있다. 바로 그 균형 속에서 나는 아동문학 작가로서 성장하고 있다.
▲비어 있는 노트와 키보드 앞오늘도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자리. ⓒ 이효진
결국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아동문학 작가의 길은 단순히 출판사와 편집자의 요구를 따르는 일이 아니다. 내 작품을 이해해줄 독자층을 찾고, 그 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혼돈과 고민 속에서도 조금씩 작품을 다듬고, 나만의 색을 지켜가며,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