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
‘허무’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있다.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의 역작이라 불러도 좋을 《노인과 바다》(1952)는 어떤가. 명성 높은 작품답게 해석도 다양한데, 인생의 허무에 맞서는 방식을 담은 소설로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허무는 ‘노인’이 상어의 습격으로부터 청새치를 지키지 못하는 순간 다가온다. 자, 어떻게 맞설 것인가. 긴 잠을 자고 일어나 묵묵히 맞선다. 현실을 인정한 채 다만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일의 항해를 희망한다. ‘인생아, 한판 붙어보자’ 하는 식이랄까. 물론 과정은 쉽지 않다. 흔들리는 순간마다 노인은 혼잣말한다. 그것으로 자기를 달래고, 다그치고, 일으켜 세운다. 한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고 사그라드는 말의 파도. 언제부턴가 나는 그것이 애처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그대로인데 읽는 기분이 변한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생의 의지를 증명하는 말에 조금 지친 듯하다. 심각한 사정은 없다. 일상의 허무가 익숙해진 것뿐이다. 달갑지 않은 허무가 손톱처럼 자꾸 자란다. 매일 그것을 자르며 이런 게 인생인가 혼잣말한다. 손끝이 단정해지면, 청새치를 매달고 항해하는 노인처럼 달뜬 희망을 품는다. 바람이 무너질 때 “이게 다 꿈이라면 정말 좋으련만” 아쉬워한다. 희망과 무망이 반복되는 기분으로 사는 것. 특별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다만 허무해도 어쩔 수 없다. 나를 달래고, 다그치고, 일으켜 세워야 한다. 살아가려면 해야 할 일이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의 일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인생의 허무에 맞서는 인간의 최선이라 믿으며. “꽤 많이” 힘들어도, 계속.
이 불멸의 고전을 다시 읽은 계기는 새 번역본을 만났기 때문이다. 올해도 새 번역본이 다수 출간됐고, 나는 그중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펴낸 책에 기대 이 글을 쓰고 있다. 번역은 황유원 시인·번역가가 맡았는데, 이전에 만난 번역본과는 어딘가 다른 지점이 있는 듯했다. 무엇이 다를까. 역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소설의 원문은 “쉼표로 줄줄이 이어진 복문”인 경우가 많고, 대화문은 극도로 짧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에서 오는 나름의 긴장감과 리듬이 존재”하는데 이 번역본은 그 부분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그는 말한다. “이런 번역본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다고, 이런 다소 무모한 시도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런 식이 아니라면 새 번역은 별 의미가 없겠다고도 생각했다.”
번역을 잘 모르는 나도 이러한 사례 앞에서는 무언가 눈치채고 만다. 자주 읽히는 작품일수록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진다는 것. 정교한 번역이란 단지 더 읽기 쉽게 바꾸는 게 아니라 본래의 작품에 더욱 가까워진다는 의미라는 것. 그리고 작품을 쓴 첫 번째 언어에 담긴 정서, 형식, 내용뿐만 아니라 이국의 언어를 읽는 얼마간의 불편함까지 제대로 구현돼 있어야 한다는 것.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인생에는 정교함 따위 없지만, 눈앞의 세상을 매번 새롭게 번역하듯 자기 세계의 크고 작은 오류를 수정한다. 읽기 좋은 세상은 없는데, 애써 읽으며 가까스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자기 세계의 번역가일 것이다. 그 세계는 인생이라 불린다. 그 안에는 불편이 있다. 허무가 있다. 그에 맞서는 각자의 방식이 있다.
(2023.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