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
거대한 슬픔이 찾아올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났다. ‘지나가는 동안’ 겪게 될 슬픔을 함부로 축소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얼마간 이해한다. 시간은 제 속도로만 가고, 우리가 타인을 향해 정확한 위로와 바람을 건넬 방법은 많지 않으므로 말로서 썩 괜찮아질 미래라도 가져오는 것 아니겠는가 싶어서다. 다만 여전한 것. 슬픔이 지나가는 슬픔은 아무리 겪은들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처음처럼 고통스럽다. 계절처럼 돌아오고 끝나야만 끝나는 종류의 슬픔 앞에 서면 그것이 인간의 과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겪는 방법 알지 못하므로 비슷한 주제나 정서가 담긴 작품을 발견하면 본능적으로 열어 본다.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배워두고 싶기 때문이리라.
서두가 길었다. 오늘은 조해진 작가의 중편소설 《겨울을 지나가다》(작가정신, 2023)에 관한 짧은 소감을 남겨보려고 한다. 나는 이 소설을 마음의 계절이 변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로 읽었다. ‘겨울이라는 통로’를 지나가는 인물의 발자취를 좇는 독서였다고 해야 할까. 소설은 ‘정연’과 ‘미연’이 ‘엄마’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모과나무 아래 엄마를 묻는다. 미연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정연은 겨울의 통로에 들어선다. 시간을 들여 엄마를 떠올리고 부재를 인식하며 자연스럽게 슬픔을 겪는다. 엄마의 집에서, 엄마 옷을 입고, 엄마가 사용하던 물건을 쓰면서. 서두르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이제 정연의 눈에는 녹아있는 눈과 천변의 해빙이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이 그를 서서히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정연의 곁에는 연한 갈색 털을 가진 개 ‘정미’가 있었다. “정미는 여전히 엄마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 엄마와의 숨바꼭질이 이어지고 있으며 자신은 언제까지라도 술래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 여기는 듯했고, 나는 그것이 정미 몫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정미 역시 애도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가장 건강한 형식으로. 여기 있던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이전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며 그이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엉뚱한 짐작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자. 인간이 아닌 존재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애도할 것이다. 울고, 넘어지고, 고개 숙이는 것만이 슬픔의 몸짓은 아니듯, 남은 이들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계속 살아가는 행태로도 떠난 이를 기릴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뒤에는 발문이 있다. ‘독자에게 쓰는 편지’라는 제목의 글인데, 나는 이 글이 지난 몇 해간 읽어온 발문 중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일부를 함께 읽어 보자. “한 가지, 기억해주시겠어요? 겨울은 누구에게나 오고, 기필코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겨울을 사는 이에게 이 문장은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위로받은 문장은 그다음에 온다. “그대가 소설을 읽은 뒤 저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그대만의 일상에서 반추하는 시간이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또 하나의 겨울을 통과하는 저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겨울을 통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글을 읽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더라도 위로가 되었으니 따라 남겨 본다. 우리는 또 한철의 겨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마다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2023.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