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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an 20. 2024

밤에 우리 말들은

김소연의 시 〈비좁은 밤〉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속담이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총명한 사람을 일컫는 이 속담의 의미를 나는 자주 곡해한다. 들을 때마다 총명한 눈빛보다는 뻔뻔한 입매가 떠오르고, 함부로 미루어 짐작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다. 그 순간 교훈과 통찰을 담은 속담은 미심쩍은 말이 되어버리는데 오래된 버릇인 탓에 멈추지 못한다. 멋대로 상상하는 버릇은 다음 속담 앞에서도 반복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낮이고 밤이고 말조심하라는 교훈을 기억하면 그만이건만 엉뚱한 상상에 빠진다. 새보다는 쥐가 백만 배쯤 더 힘들겠다고. 이 역시 미루어 짐작하기와 다를 바 없겠지만, 나름의 근거가 있다. 경험이 있다. ‘나’를 괴롭히는 말들은, 환하고 소란한 낮보다는 까맣고 고요한 밤에 더 가득 찾아왔으므로. 그런 말들을 들어야 할 쥐들은 얼마나 힘들까. 더구나 매일 야간 근무라니. 〈비좁은 밤〉*의 화자 역시 쉽지 않은 밤을 자주 겪는 듯하다.



 너무 많은 말이 밤으로 밤으로 밀려갑니다     

 해서는 안 되는 말들과 하나 마나 한 말들이 밤으로 터덜터덜 걸어갑니다     

 어느 지점까지만 헤아리다 만 생각들이 어제처럼 또 그제처럼 밤에게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도 조금 더 해보았다면 그럴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반복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않았을 것이라는, 익숙한 이 후회 역시 낮을 배웅하며 어딘가에 걸터앉아 밤을 기다리고 있군요(1~5연)



 밤이 말들의 정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필, 밤인가. 기분 또는 호르몬의 영향일 수도 있고, 밤의 고요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진종일 외부로 향하던 ‘나’의 시선과 말들이 이 순간 향할 대상을 찾지 못해 ‘나’의 곁에 머무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 말과 독대하는 밤이 ‘나’에게만 벌어지는 특별한 순간은 아니라는 것. 세상에는 밤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아늑하게 내려앉고 있습니다     

 바깥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며 서성이는 사람과 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뒤척이고만 있는 사람과 티브이를 켜놓았지만 눈은 그걸 바라보고 있지만 홈쇼핑 광고가 반복되는 것도 모른 채로 앉아만 있는 사람과 그 사람에게 말을 걸려다 그냥 옆에 앉아만 있는 사람과 빨래를 천천히 개며 마룻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과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공원을 세 바퀴 네 바퀴 뛰고 있는 사람과 벤치에 앉아 방전돼버린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사람의     

 너무 많은 속엣말이 한밤중으로 먹구름처럼 한꺼번에 몰려듭니다     

 그들이 했으면 좋았을 말들과 꼭 하겠다고 다짐해온 말들이 어지럽게 밤의 골목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밤은 오늘도 성긴 그물처럼 그 누구의 말들도 건져 올리지 않은 채     

 아무것도 아는 바 없다는 듯 매끈한 뒷모습을 하고 저편으로 나아갑니다(6~11연)



 밤은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않고 돌아선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외롭다. ‘나’에게 남은 정념과 상념의 말을 홀로 견뎌야 하기 때문이리라. 연락도 만남도 제한된 그런 밤에 우리 각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서 밤이 떠나가기를 요청하는 것. 그러니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다만 잠은, 누군가에겐 소망과 같아서 억지를 부려도 이뤄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모두가 잠든 밤 누군가는 깨어 있다.



 사람들이 불을 끄듯 말을 끄고 하나하나 잠들기 시작합니다     

 책상에 앉아 씌어지는 대로 쓰고 지우지 않아보기로 결심한 사람의 어깨 위에     

 너무 많은 말이 모여들고 모여듭니다     

 어깨에서 말들이 조용히 낙하합니다     

 종이 위에 안착하자마자 눈송이처럼 녹아 사라지고 있습니다(12~16연)     



 마지막 연이다. 책상에 앉은 사람은 지금 글을 쓴다. 미뤄둔 말들을 전부 옮겨 적는다. 나는 이것이 댐의 수문을 여는 일처럼 보인다. 가득 찬 말을 내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종이에라도 쏟아내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왜 종이에 안착한 말(글)들이 “녹아” 사라지는 것일까? 글쓰기가 치유와 위무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일까? 지나친 짐작은 아닐 테지만 다른 이유를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입으로든 손으로든 ‘나’의 밖으로 꺼내 놓는 순간 “녹아 사라지”는 것. 말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기화한 말들이 낮 동안 먹구름 안에서 쉬다가 밤이 오면 깨어 있는 사람에게로 “터덜터덜 걸어”서 되돌아오는 것도 설명이 된다. 말 많은 밤이 지치지도 않고 순환되고 반복되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충분한가. 밤이 말로 비좁아지는 이유를 (얼핏) 알았으니 밤의 말들을 견디는 일도 쉬워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겪을 때마다 괴롭다. 생각이 꼬리 물기하고, ‘그런 말은 하지 말걸’ 후회하거나 ‘말을 줄여야겠어’ 다짐하는 새벽 역시 지겹다. 다만 나쁘기만 한 일은 드물다. 말로 비좁아진 밤과 새벽에는 그와 어울리는 시를 볼 수 있어서 귀하다. 시를 보기 적절한 순간은 없지만 유독 긴 밤에 유용한 시는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모르게 되는 시. 사람 같고 생활 같은 시. 그러니까 이런 시를 만나게 해준다. 밤에 우리 말들은.


(2024. 01. 19.)

(@dltoqur__)




*《촉진하는 밤》(김소연, 문학과지성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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