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우주를 삼킨 소년》
아직 석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올해의 시리즈’로 뽑고 싶은 작품을 만났다. 그것을 소개해 보려고 이 글을 쓴다. 누군가 특정 시리즈를 보고서 ‘변화’를 운운하면 내심 과장으로 여겼는데, 《우주를 삼킨 소년》(넷플릭스, 2024)를 본 후론 그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했다. 달라진 건 없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도 없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천천히 돌아보니 감정과 인식이 변한 듯하다. 그러나 두 가지를 나누어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디딜 때처럼 두 변화는 동시에 진행된 것일 테니까. 그 순서는 이랬다. ① 호감과 기대 ② 걱정과 우려 ③ 슬픔과 공감 ④ 희망의 발견. 이것은 작품에 관한 소감과 다르지 않으므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려고 한다.
1980년대 브리즈번을 배경으로 한 이 호주 시리즈의 주인공은 ‘일라이’(펠릭스 카메론). 씩씩하고 천진하며 탐구심 강한 10대 소년이다. 스페인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 카를레스 푸욜을 연상케 하는 긴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한 소년을 보며 나는 기대했다. 이제 흥미진진한 모험을 시작하리라. (① 호감과 기대)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동 착취’ 또는 ‘학대’처럼 무시무시한 단어가 떠올랐다. 일라이의 환경이 그랬다. 엄마는 마약 중독을 겪었고, 엄마를 마약에 빠뜨리고 꺼내 준 장본인인 새아빠는 마약 판매를 그만두지 못했다. 멈춰야 할 텐데. 우려하는 사이 일라이마저 그 일에 가담한다. 이래도 되는가? 지켜보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② 걱정과 우려)
불안은 곧 슬픔으로 변했다. 일라이 부모들의 분투를 보며 무책임한 어른이라고 비난할 자신이 없었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두 자기 삶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모르면’ 몰라도 ‘엿보고 나면’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니까. 그래서 공감했다. 살아가는 일의 절실함. 또는 사랑을 지켜내는 일 앞에서 서툰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③ 슬픔과 공감)
그러는 동안 소년은 자기 삶에 놓인 고통을 헤치고 나아갔다. 부모를 밀어내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사랑으로 이야기를 완성한 것이다. 일라이에게 사랑은 문제의 원인이지만, 극복의 도구이기도 했다. 사랑해서 다치고, 사랑으로 치유했다. 여하한 과정을 통해 모두를 구한 소년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④ 희망의 발견)
그러므로 사과를 전하고 싶다. 나는 일라이가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의심했다. 미약하고 무력하게 여겼다. 이러한 인식은 ‘아이들은 자기 인생을 구체화할 자유와 욕망을 가질 수 없다’ 식의 편협함으로부터 생겨난 것일 테다. 부끄러운 나의 인식을 잠시나마 바꿔준 일라이에게 사과와 함께 고마움도 전하고 싶다. 또 한 번, 달라져야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작품은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리즈이다. 원작은 호주 작가 트렌트 돌턴의 데뷔작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나는 아직 소설을 읽지 못했는데 시리즈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의 내면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인물의 내면을 직접 ‘읽을’ 수 있는 건 영상물과 다른 소설만의 장점 중 하나이건만 왜? 연출의 힘인가? 열연이 원인일까?
어떤 것도 정확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한 가지 정확한 게 있다면 (소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시리즈에는 사랑을 통해 희망을 구하는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그것으로 희망을 믿게 한다는 것이리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상물은 예전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보고 싶다. 문학이어도 좋고 영화여도 관계없다. 희망이 그렇듯 언제나 환영이다.
(2024. 0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