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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로움 Oct 18. 2021

하루 종일 우는 아기와 초보 엄마

육아는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아기는 울음소리로 의사표현을 한다. 배가 고플 때, 기저귀가 젖었을 , 졸릴 때, 불편할 때, 심심할 때 등등 아기는 응애~하며 엄마에게 신호를 보낸다. 육아를 시작하고 3개월 정도 되면 아기의 시그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있는 노련함이 생길  같지만, 대부분 아기의 하루 일과 패턴을 염두하고 지레짐작으로 알아듣는다. 그래도 울음소리마다 특징이 있어 찰떡까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알아들을 수는 있다.


아기니까 울지, 울어야 아기지. 나도  말을 했었다. 육아를 하기 전까지는 애기가 울지 그럼 '엄마,  주세요. 배고파요'하고 말을 하겠는가?라고 생각해왔다. 아기가 우는 것을 하루 종일 듣기 전에는  의미가 무엇인지 상상조차  했다. 핑크빛 상상  로망으로 점령당했던 지난날의 생각은 이랬다. ' 아기의 울음소리는  귀엽고 사랑스러울 거야.  자상하게 웃으며 아기를 달래겠지?'


어느 날 당신의 친구가 '야 술 한잔 하자, 오늘 좀 힘드네'하며 당신을 불러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소주잔을 한두 잔 비우기 시작하자 친구가 갑자기 한숨을 내뱉고는 이내 눈물을 보이며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이 극에 달해 고개를 처박고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운다면 당신은 어떻겠는가?


무척 당황스러울 것이다. 걱정이 될 것이다.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눈물을 충분히 쏟아낼 때까지, 주변의 시선이 조금은 신경 쓰이겠지만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친구를 따듯하게 안아주거나 등을 쓸어내려주며 위로해주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오열했던 이유를 딱히 말하진 않는다. 그저 상황만 추리해 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친구가  매일매일, 하루에 두세 번씩 당신을 앞에 세워두고 운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 당신은 친구를 얼마나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아, 이 자식 또 그러네? 이번엔 또 뭐야?'라며 한숨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처음엔 아주 애처롭게 들리던 그 눈물과 울음소리가 점점 질령이 날것이다. (비슷한 예시로는 툭하면 우는 여자 친구 버전도 있다.)


잠시 상상만 했을 뿐인데 속이 갑갑하고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렇다고 친구나 여자 친구가 미워지는 건 아니다. 그 상황 자체는 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 우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이유는 말해줘야지~!


살면서 누군가의 울음소리를 그것도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우는 소리는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근데 요즘은 매일이 그렇다. 매일 내 귀 3cm 앞에서 운다. 정말 있는 힘껏 온몸의 힘을 주며 최선을 다해서 아기가 운다. 그런 아기를 달래다 보면 내 마음은 거의 태풍에 쓸려가 버린 정원처럼 엉망진창이 된다. 매일 밤 육퇴를 한 뒤 정성스럽게 정원을 다듬고 원상복귀를 시켜보지만 새벽부터 시작되는 태풍을 감당하다 보면 점점 더 엉망인 상태가 되어갈 뿐이다.


물론, 아기의 모든 울음이 태풍처럼 무서운 건 아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귀여운 목소리도 있다.   때로는 아기의 울음이 산들바람으로 달고 부드럽게 불어온다. 하지만, 방심한 사이에 강풍주의보로 바뀌기도 하고 태풍경보로 바뀌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하는 아기라는 바람에 적응해야 하는 건 내 마음의 정원이다. 아기는 살아가기 위해, 요구하기 위해 꾸준하게, 끊임없이 바람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아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울음소리와 지금은 현저하게 다르다. 100일을 세상에서 보낸 아기는 감정과 자아라는 게 생겼다는 게 뚜렷하게 보인다. 엄마와 아빠를 알아보고 낯선 이를 구분한다. 기쁨과 슬픔, 짜증, 화남이 울음소리와 표정, 몸짓에서 드러난다. 옹알이라는 표현법을 이용해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알린다. 옹알이에는 울음보다 더 다양한 감정이 들어있다.(울음이 거의 네거티브라면 옹알이는 포지티브도 많다) 또한 아기에게는 다양한 상황이 생겨난다. 모빌을 보며 소리 지르며 웃기도 하고 뒤집기에 실패해 속상한 마음에 짜증을 내기도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면 놀라고 겁이 나서 크게 울어버리도 한다. 이렇게 두세 달이 된 아기는 하루 종일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와아앙 하고 우는소리가 많을수록 힘든 하루가 되고, 까르르 웃는 소리가 많을수록 행복한 하루가 된다. 아기의 컨디션에 따라 엄마의 하루가 결정된다. 산들바람이 깃든 하루일지, 태풍을 그대로 맞아 힘이 다 빠진 하루일지는 그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아기의 마음은 아기만 알기 때문에.



엄마가 되면서 처음으로 육아를 하게 되고, 마음의 정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정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내가 죽을 때까지 가꿔야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출산의 고난을 겪은 엄마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회복해 사람처럼 살게 되었지만 이내 마음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아오면서 겪은 힘듦과는 결이 다른 어려움들이 생겨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은 경험해야만 알 수 있다. (부모에게 느끼는 그 감정과는 정말 다르다)


마음의 정원에 어떤 식물을 심을지는 엄마가 결정한다. 작고 연약하지만 예쁜 꽃들로 골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향긋한 정원이 펼쳐질 거란 환상은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현명할 것이다. 육아는 앞으로 계속 새로운 과제를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아주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튼튼한 나무의 묘목으로 골라보자. 아기의 기분이 좋은 어느 날은 정원에 따듯한 햇볕과 적절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또 어느 날은 소나기가, 어느 날은 태풍이 불어 닥칠 것이다. 그렇게 정원의 나무는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언제라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없이 버텨낼 것이다.


아기를 키우면서 엄마는 강해진다. 강해져야만 하는 처절함은 아니다. 아기에 대한 책임감과 모성애가 자양분이 되어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동반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성장통이 지난 뒤의 모습은 언제나, 늘 멋지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3달 전의 내 모습보단 지금 더 멋있어진 것 같다. 지금의 내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여전히 꿈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나'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엄마'로서 성장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



꾸준히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를 써내려 가는 요즘이지만 매일 밤마다 '네가 엄마에게 오다니, 이렇게 소중한 네가 나의 아기라니, 너무나 감사해, 고마워'라며 잠든 아기의 곁에 속삭인다. 그만큼 대체 불가한 존재이다. 자식을 낳는다는 건 정말 감사한 경험이다. 나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나를 더욱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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