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자답 노트를 만들어보다
서른을 코앞에 두었더니 어딜 가나 서른이 보였다. 아무리 조심조심 걸어도 발을 찧었다. 악! 서른이라니. 내가 서른이라니!
얼마 전엔 친구와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스물 될 땐, '우리가 서른 즈음엔' 하며 집이 있을 것이네, 결혼을 했을 것이네, 어디 있을 것이네 했는데 지금의 모습이라고. 일을 어느 정도 했으면 10년은 불안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바로 1년도 불안한 게 지금인 것 같다고.
그 얘기에 연이어 끄덕였다. 그 말대로 불쑥 불안했다. 뭘 하든 "이러는 게 맞나?"의 연속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이게 맞나, 돈 관리는 이게 맞나, 이런 일 하는 게 맞나, 내가 하고 싶은 게 이게 맞나, 응?
나는 생각을 메모하는 걸 좋아한다. 생각을 쓰면서 어떻게 할지 정하는 것이 좋은 데다가 직접 쓰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꽤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되짚어보니 며칠, 몇 주 전의 내가 이미 써 내려가면서 생각을 마친 불안을 또 쓰고 있었던 것이다. 불안을 많이 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닌데 왜 나는 같은 불안을 겪고 있었던 걸까?
내가 이제까지 한 불안에 대한 작성은 아래와 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답이 없다.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론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 때문에 불안해'하고 끝.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그 불안에 대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손 아프게 쓰기만 한 것이다.
둘째, 휘발한다. 작성한 것을 다시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쓴 걸 되짚는 것도 꽤 고된 일이지만, 힘껏 마주한 것을 다시 돌아보지 않는 것은 불안을 글자로 실체화하고 피하기만 한 것이다. 마치 요괴를 기록한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요괴가 있고, 어째서 나타났고,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다. 그래서 두렵다.
셋째, 반복한다. 답은 없고, 휘발되니까 똑같은 걱정을 한다. 이게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면 작성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자문자답 노트는 인생의 매뉴얼 만들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접근성을 더 높였다. 가지고 다니면서 직접 작성하고, 직접 답을 적어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규칙은 이렇다. 모든 문장 앞에 네모칸을 그리고 안에 무슨 문장인지 알 수 있는 표시 한다.
? : 질문. 지금 생각하는 고민, 걱정, 불안.
=> : 그 질문에 대한 대답.
! : 갑자기 생각난 일정, 상기시켜야 할 생각
V : 지금 나에게 도움 되는 말
☆ : 내가 언젠가라도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 : 아직 질문으로도, 결론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생각
… : 음...
■ : 결론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했다면 무조건 대답을 이어, 결론까지 도달한다. 이 두 가지의 규칙만으로도 생각이 정리가 되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볼 수 있다.
결론을 짓는다는 것은 해결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소할 수 있는지, 해결방법이 있는지,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유보한다는 건지 구분할 수가 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더라도 어디까지 내가 생각해봤는지, 다시 맨 처음부터 우울할 필요 없다는 게 위안이 된다.
또, 질문으로 시작하지 않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과 아이디어를 표시와 함께 적어보면 내가 뭐가 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그걸 내가 할 수 있는지 상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를 생각하면 하고 싶었던 게 연속으로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게 된다.
[?] 나는 서른을 코앞에 뒀다고 왜 불안했을까? 홀로 지내고 있어서?
나의 커리어가 불안해서? 내가 직업을 수단으로 뭘 이뤄야 할지 모르겠어서?
[?] 무엇이 '나의 서른'을 불안하게 한 걸까?
나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서른 전까지 얼마를 모을 것인지를 정해놓았더니 서른 전의 모든 소비가 불안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위한 목표 없이 '얼마를 모을 것'을 목표했더니 거기에 다가가지 못하는 건 그저 후퇴였다. 동시에 철저한 투자원칙에 따라 움직였지만 전에 없던 상승장에 눈이 멀어 크게 잃었다. 모으려던 '얼마'는커녕 끝없이 후퇴했다.
다시 질문을 이었다.
[?] 내가 돈을 잃어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 불안한가?
[=>] 잔고가 늘어나지 않을 때, 뭘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 돈이 아니면 뭐라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 불안을 해소해줄 것이라 믿었다. 새로운 취미, 새로운 배움, 새로운 물건 등. 하지만 그런 믿음이 사라졌다.
[V] 이국종 교수는 말했다. "(전략)... 구내식당 점심 반찬이 잘 나온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 나에겐 기초단위 행복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지금까지 내가 뭘 좋아했고, 뭘 할 때 고양감을 느꼈는지, 어딜 갔을 때 여유를 온전히 느꼈는지를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 구원은 셀프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 취향의 것에서 계속해서 행복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서른을 앞둔 고민으로 시작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쌓은 취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로부터 기초단위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알았다. 마치 탈무드의 일화를 스스로 만들어내어 읽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랍비*가 말했다, "너의 불안은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탈무드와 다른 것은 질문하는 것도 나이며, 랍비가 나 자신이라는 것. 대답도 내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이 소중하여 이렇게 글로 공유한다.
* 랍비(Rabbi) : 나의 선생님, 스승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로 유대교의 현인을 나타낸다. 주로 탈무드에서 지혜로운 자의 역할을 랍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