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로맑음 스튜디오 Nov 25. 2022

스스로를 구원하는 노트 만들기

자문자답 노트를 만들어보다

  서른을 코앞에 두었더니 어딜 가나 서른이 보였다. 아무리 조심조심 걸어도 발을 찧었다. 악! 서른이라니. 내가 서른이라니!


  얼마 전엔 친구와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스물 될 땐, '우리가 서른 즈음엔' 하며 집이 있을 것이네, 결혼을 했을 것이네, 어디 있을 것이네 했는데 지금의 모습이라고. 일을 어느 정도 했으면 10년은 불안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바로 1년도 불안한 게 지금인 것 같다고.


  그 얘기에 연이어 끄덕였다. 그 말대로 불쑥 불안했다. 뭘 하든 "이러는 게 맞나?"의 연속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이게 맞나, 돈 관리는 이게 맞나, 이런 일 하는 게 맞나, 내가 하고 싶은 게 이게 맞나, 응?



  나 방금 똑같은 불안을 또 한 것 같은데?

나는 생각을 메모하는 걸 좋아한다. 생각을 쓰면서 어떻게 할지 정하는 것이 좋은 데다가 직접 쓰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꽤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되짚어보니 며칠, 몇 주 전의 내가 이미 써 내려가면서 생각을 마친 불안을 또 쓰고 있었던 것이다. 불안을 많이 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닌데 왜 나는 같은 불안을 겪고 있었던 걸까?



  내가 이제까지 한 불안에 대한 작성은 아래와 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답이 없다.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론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 때문에 불안해'하고 끝.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그 불안에 대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손 아프게 쓰기만 한 것이다.


둘째, 휘발한다. 작성한 것을 다시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쓴 걸 되짚는 것도 꽤 고된 일이지만, 힘껏 마주한 것을 다시 돌아보지 않는 것은 불안을 글자로 실체화하고 피하기만 한 것이다. 마치 요괴를 기록한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요괴가 있고, 어째서 나타났고,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다. 그래서 두렵다.


셋째, 반복한다. 답은 없고, 휘발되니까 똑같은 걱정을 한다. 이게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면 작성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래서 "자문자답 노트"를 만들었다.

자문자답 노트는 인생의 매뉴얼 만들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접근성을 더 높였다. 가지고 다니면서 직접 작성하고, 직접 답을 적어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규칙은 이렇다. 모든 문장 앞에 네모칸을 그리고 안에 무슨 문장인지 알 수 있는 표시 한다.


? : 질문. 지금 생각하는 고민, 걱정, 불안.

=> : 그 질문에 대한 대답.

! : 갑자기 생각난 일정, 상기시켜야 할 생각

V : 지금 나에게 도움 되는 말

☆ : 내가 언젠가라도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 : 아직 질문으로도, 결론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생각

… : 음...

■ : 결론


계속 질문과 대답, 결론을 이어가는 자문자답 노트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했다면 무조건 대답을 이어, 결론까지 도달한다. 이 두 가지의 규칙만으로도 생각이 정리가 되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볼 수 있다.



  결론을 짓는다는 것은 해결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소할 수 있는지, 해결방법이 있는지,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유보한다는 건지 구분할 수가 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더라도 어디까지 내가 생각해봤는지, 다시 맨 처음부터 우울할 필요 없다는 게 위안이 된다.



  또, 질문으로 시작하지 않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과 아이디어를 표시와 함께 적어보면 내가 뭐가 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그걸 내가 할 수 있는지 상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를 생각하면 하고 싶었던 게 연속으로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게 된다.



앞서 한 '서른을 앞둔 고민'을 자문자답 노트로 이어가 봤다.

  [?] 나는 서른을 코앞에 뒀다고 왜 불안했을까? 홀로 지내고 있어서?

       나의 커리어가 불안해서? 내가 직업을 수단으로 뭘 이뤄야 할지 모르겠어서?

  [?] 무엇이 '나의 서른'을 불안하게 한 걸까?

  나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서른 전까지 얼마를 모을 것인지를 정해놓았더니 서른 전의 모든 소비가 불안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위한 목표 없이 '얼마를 모을 것'을 목표했더니 거기에 다가가지 못하는 건 그저 후퇴였다. 동시에 철저한 투자원칙에 따라 움직였지만 전에 없던 상승장에 눈이 멀어 크게 잃었다. 모으려던 '얼마'는커녕 끝없이 후퇴했다.

  다시 질문을 이었다.

  [?] 내가 돈을 잃어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 불안한가?

  [=>] 잔고가 늘어나지 않을 때, 뭘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 돈이 아니면 뭐라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 불안을 해소해줄 것이라 믿었다. 새로운 취미, 새로운 배움, 새로운 물건 등. 하지만 그런 믿음이 사라졌다.

  [V] 이국종 교수는 말했다. "(전략)... 구내식당 점심 반찬이 잘 나온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 나에겐 기초단위 행복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지금까지 내가 뭘 좋아했고, 뭘 할 때 고양감을 느꼈는지, 어딜 갔을 때 여유를 온전히 느꼈는지를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 구원은 셀프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 취향의 것에서 계속해서 행복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서른을 앞둔 고민으로 시작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쌓은 취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로부터 기초단위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알았다. 마치 탈무드의 일화를 스스로 만들어내어 읽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랍비*가 말했다, "너의 불안은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탈무드와 다른 것은 질문하는 것도 나이며, 랍비가 나 자신이라는 것. 대답도 내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이 소중하여 이렇게 글로 공유한다.




* 랍비(Rabbi) : 나의 선생님, 스승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로 유대교의 현인을 나타낸다. 주로 탈무드에서 지혜로운 자의 역할을 랍비라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