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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Jul 24. 2021

완벽이라는 허상

3. 완벽주의? 이렇게나 부족한 제가요?

나는 심한 완벽주의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엄청나게 높다. 이젠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완벽주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이해가 안 되던 일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완벽주의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항상 의아했다. '음, 저 정도로는 완벽주의가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스스로 완벽주의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하고. 스스로를 완벽주의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비꼬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그 확신을 가지게 되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욕심이 많아서 매사에 되게 열심야', '나는 영어를 잘해', '나는 글을 잘 써'라는 식으로 스스로 무엇을 잘한다고 내세우는 사람들도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욕심이 많다고도, 무엇을 빼어나게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스무 살 때, 한 선배가 "**아, 너는 글을 참 잘 쓰는 것 같다"라고 말해줬을 땐 '내 나이에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나 정도로는 글을 잘 쓴다고 할 수가 없지'하고 생각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씨는 아마 자기 스스로에게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융통성 없는 기준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모든 면에서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나는 완벽주의인가?


내가 아는 건 내 기준이 언제나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 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쉽게 확신을 가지는 것 같았다.  "나는 완벽주의야"라고 칭하는 것도, 스스로 세워둔 '완벽주의가 되기 위한 기준'을 충족했다고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나는 완벽주의라고 하면, 하는 일에 작은 흠집 하나만 나더라도 눈을 치켜세우며 견디지 못해 하고, 또 그 엄격함 덕에 큰 성공을 이룬 사업가나 한 분야의 전문가 정도는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기에 내 기준에서 난 완벽주의가 아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모든 수험생들이 선망하는 대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살면서 한 번도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내 옆에는 나보다 학구열에 불타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보다 공부에 열심인 사람들도 많았다.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온 건 그저 천운이 따라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모든 기준이 높으면서도 욕심이 많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경쟁이나 1등을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을 1등급에서 9등급까지 나누던 고교 성적 체제 속에선 언제나 한 마리 돼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1등급 육질의 돼지~ 너는 2등급 육질의 돼지~ 하고 빨간 낙인이 땅땅! 찍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스스로 완벽주의인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완벽주의'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딱히 잘하는 게 없으니까 성실하기라도 해야 해'하고 생각하고는 하루에 세운 계획을 다 지키지 못하면 심하게 자책했다.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한참을 고민하고 반성했다. 내 기준에서 '최선을 다한다'라는 건 잠자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쉬는 시간도 모두 희생해가면서 이를 악물고 더 할 수 없을 만큼, 정말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할 수 있는 힘을 모두 다 쓰는 걸 의미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든 간에 그건 지나고 보면 '최선을 다하지는 않은 열심'이었다.


인터넷에 완벽주의란 무엇인가를 찾아보니, '이루기를 원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보다 완벽한 상태가 존재한다고 믿는 신념'이라고 했다. 나와 부합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심리학 팟캐스트에서 '완벽주의 테스트'라는 것을 알려주길래 문항에 따라 답해봤더니 심한 완벽주의 성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충격적이었다.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가 과대포장되어있다고 느끼며 평생 나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왔는데, 이런 내가 완벽주의라니? 완벽주의는 강박적일 정도로 냉철하고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태도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만이 가져갈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었던가?


의사 선생님은 '완벽'이라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완벽을 쫒는 건 허상이라고. 내가 '이 정도 실력으로 내 분야에서 인정받고 먹고살 수 있을까'가 항상 두렵고 자신이 없다고 고백하니 그건 의사인 본인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저도 정신과 의사지만, 여기엔 저명한 심리학 교수님이나 또 상담가 분들도 많이 오세요. 물론 의사이기에 약을 처방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긴 하지만, 요즘 약은 인터넷에만 검색해도 다 나오는 거 아시죠? 몇 가지 키워드로 검색만 해도 어떤 증상에는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 주르륵 나오죠. 근데요, 직업으로 밥벌이를 하고 산다는 게, 꼭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지만 할 자격이 있는 건가요? 그냥 평균적인 사람들보다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도 평균적인 사람들보다는 의학지식이 있으니까 그런 쪽에서 도움을 드리면 되는 거고. **씨도 그 분야에서 대한민국 평균 사람들보다는 더 지식이 있으신 거니, 그만하면 그 직업으로 먹고살 만한 거고"


그리고 나에게 부족한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실력보다도 '성취감의 부재'라고 덧붙였다. "**씨는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작은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커다란 성취만을 성취라고 느끼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는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전혀 못 느끼는 거죠. 나 오늘 일찍 일어났다, 나 오늘 요리를 했는데 정말 맛있게 잘 됐다. 이런 것들에서도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불행하게도 나는 현재에 만족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10대 때부터 타인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 거품이 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부족함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워서 내가 실력이 없다는 걸 어떻게 잘 숨길지 전전긍긍했다. 하나의 성취를 이뤄도 그것을 즐기기보다는 바로 다음에 이뤄야 할 성취를 생각했다. 하나하나 성을 정복해가는 장군 마냥 '오케이, 이거 하나 끝났고, 이제 다음번 정복할 성은 저거다, 돌진!' 하는 마음가짐으로 매 순간을 살아냈다.


왜 나는 그렇게 어린 10대 때부터 내가 부족하다고 믿었던 걸까? 어디서부터 실이 엉키기 시작한 걸까? 가만가만 그 엉킨 실타래의 끝을 찾아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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