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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Jul 22. 2021

이제 너무 지쳤어요

1. 정신과에 갔다

먼저 말해두자면, 나는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혼자 힘들어 하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엔 대학생 때의 경험이 작용했으리라 생각하는데, 부전공을 해볼까 하고 호기심에 신청해 본 심리학 전공 수업 몇 개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이상한 경험을 여러 번 했던 것이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말해보자면, 상담 수업에서 교수님이 "사이가 틀어져서 내가 말을 섞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보라"라고 했을 때 강의실의 4분의 1이 넘는 학생들이 손을 드는 걸 보면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세상 사람들은 엄격한 잣대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지만 사실 그 어떤 것도 비정상일 건 없구나' 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성격심리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사실 사람의 성격이나 재능이라는 건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 많아서 아무리 노오력 해도 안 되는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는 내용의 강의였던 걸로 기억한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게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예요. 한국에서는 뭐든지 노력하면 다 된다고 가르치니까 애들이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얼마나 힘들어하고 고생을 합니까? 어떤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건 분명 있어요. 그럼 안 되는 거 말고 되는 걸, 타고난 성격과 재능을 살려서 할 수 있는 걸 찾아줘야지요. 획일적으로 '노력하면 다 되는데, 이건 네가 노력이 부족해서 못하는 거야'라고 가르치는 게 오히려 더 잔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 당시 나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길게 말했지만 요지는, 나는 정신과나 심리센터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심리학 수업들에서 의도치 않게 치유의 경험을 했고, 그 작은 경험들이 쌓여 내 인생의 방향과 결을 시나브로 바꿔놓는 것을 느껴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해봤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나조차도 막상 내 일이 되자 정신과에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병원에 가볼까 한다는 말에 '다들 힘든 삶 견디면서 사는 건데 네가 너무 나약한 것 아니냐'라고 대꾸하는 지인들을 보면서 정신과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 무섭게 와닿았기 때문이고, '그거 약을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끊을 수 없다던데?' 하는 말에 흠칫 겁이 났기 때문이다.


어느 정신과를 가야 할지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신과는 의사 선생님과의 '합'이 중요해서 나와 잘 맞는 병원을 찾아야 한다던데,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난다는 21세기 한국에서 정신과 후기를 찾는 건 어마어마하게 어려웠다. 내가 생각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회사나 집과 너무 멀지 않을 것. 두 번째, 약물을 쓰되 상담에도 집중해주는 선생님을 찾을 것. 유명하다고 하길래 용기를 내서 전화를 해보면 초진은 두 달 후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곳이 부지기수였고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던 나는 두 달을 혼자 버텨낼 자신은 없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 끝에 회사 근처 정신과를 어렵게 예약했다. 행여 회사 사람 중 누군가에게 목격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퇴근을 하고는 잽싸게 병원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찾아간 정신과는 소란스러운 바깥세상과는 달리 조용하고 고요했다. 병원 풍경만 보자면 여느 내과나 이비인후과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내 또래 같아 보이는 환자들이 많길래 힐끔, 눈치를 보다가 이곳은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온 피난소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다들 어떤 사연을 가지고 이곳에 오게 된 걸까.


정신과에 처음 가면 설문지를 주고 작성하도록 한다. '세상에 나 혼자인 듯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 '예전만큼 기쁘거나 성취감이 들지 않는다' 등의 문항들이 주르륵 적혀있고, 각 문항을 내 상황에 맞게 1점부터 5점 척도로 표시하면 된다. 그리 길지 않은 설문지를 작성하면서 웃기게도 문득 '드디어 와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은 내가 너무 지쳤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던 걸까? 나중에 의사 선생님이 말하길, 내가 들어오자마자 한 말도 "제가 너무 지쳤어요"였다고 한다.


첫 진료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의사 선생님이 나도 모르고 있던 내면의 상처를 끄집어내서 아픈 곳을 훅-찌르고 나는 엉엉 우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문지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체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의사 선생님은 내 우울이나 스트레스 정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다고 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 중인 것을 생각하면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고 하여 항불안제 한 알만 잠자기 1시간 전에 먹어보자고 했다. 다만 성취감과 즐거움은 다른 것임을 구분하고, 나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준을 유연하게 낮추는 과정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한눈에 내 성격을 짚어내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흠칫 찔렸지만, 그래도 항불안제 한 알이면 이전처럼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가 금방 일어나서 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회복에 몇 달, 혹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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