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눗방울 Sep 24. 2021

인생도 꽉 채우지 말고, 미니멀하게

11. 내가 소진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삶이란- 2

나를 미워하는 마음


작년에 함께 일했던 클라이언트가 감사하게도 올해도 일을 맡기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견적서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작년에 일을 할 때는, 내가 너무 햇병아리였을 때여서 실수로 견적을 터무니없이 적게 냈었다. 견적을 잘못 낸 것도 내 잘못이니, 결국엔 헐값에 작업을 해서 넘겼다. 잘하면 내년에 또 연락이 올 수도 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력서 한 줄은 쌓을 수 있겠지, 하면서. 그 당시 업계 기준가의 1/6, 1/7도 안 되는 가격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작업을 했던지라 올해 견적이 6배, 7배 올라버리면 그걸 클라이언트 측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됐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일을 같이 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신 거면, 정기적인 클라이언트가 될 확률이 높으니 깎아서 해드릴까 싶다가도 또 저번처럼 터무니없는 가격으로는 작업해 드릴 수가 없어서 참 난감하다.


주위 동료들에게 물어 업계 기준 요율표와 함께 살짝 할인된 가격으로 견적을 내서 전달드렸는데, 이 금액은 내가 봐도 클라이언트에서 용납이 안 될 것 같다. 누구나 일을 하는 사람은 높은 가격을 받고 싶어 하고, 일을 맡기는 사람은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어 한다. 받고자 하는 가격과 주고자 하는 가격의 차이가 큰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이렇게 업무 의뢰가 들어와도 신경 쓸게 많다.


완벽주의를 내려놓자, 나 스스로를 폄하하고 자책하는 걸 그만두자, 미리 불안해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했는데도 쉽지가 않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동료들을 떠올리며 '이 클라이언트도 그 친구에게 일을 맡긴다면 같은 가격에 더 좋은 결과물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하는 못난 생각을 했다가 '그 친구는 이 가격이 너무 비싼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은 안 하겠지? 나보다 본인의 실력에 더 자신이 있겠지?' 하며 부러워하다가 '내 주제에 업계 기준가를 고수하다가 정기 클라이언트가 될 회사를 놓치는 게 아닐까?' 하며 불안해한다.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면 상황이 좀 더 명확해진다. 나는 업계에서 엄청나게 잘 나가는 소위 '탑티어'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업무를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설령 실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놈의 자책감과 자기 의심과 책임감이 그 갭을 채워내고야 말 거다. 작년에 일을 맡긴 클라이언트가 1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전화를 줬다는 것도 어쩌면 그 정도로 내 실력이 형편없지 않다는 증거인지 모른다.


제발 오버하지 말자, 내가 우울증을 통해 배운 것들을 실천하면서 살자. 나 스스로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자. 지금까진 10등이면 왜 9등이 아니냐고, 2등이면 왜 1등이 아니냐고 채찍질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젠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 삶을 살자. 나를 조금 더 다독이고 예뻐해 주자, 하고 가만가만 말해본다. 이 클라이언트와 연이 닿지 않는다면, 이후에 내 몸값을 6배, 7배 낮추지 않고도 함께 해줄 클라이언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조금 더 가볍게 마음먹어본다.



비움의 미학


사람들은 보통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뭔가를 더 채워 넣으려고 한다. 나도 사는 게 지루하고 재미가 없으면 어떻게든 인생에 뭔가를 더 넣어보려고 했다. 돈이 없어서 그런가, 하고 부업을 해보기도 했다가 친구를 안 만나서 그런가, 하고 친구들이랑 한 달 내내 술을 진탕 마셔보기도 하고 취미가 없고 자기 계발을 못해서 그런가, 해서 또 원하지도 않는 걸 이것저것 바쁘게 시도해보기도 했다.


근데 가끔은 인생이 불만족스러운 걸 넘어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다. 나의 경우는 첫 직장을 다닐 때, 또  우울증을 겪을 때 그랬다. 이런 순간마다 나도 '대체 뭘 채워 넣어야 인생이 더 나아지지?'를 매번 고민했는데, 결국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땐 내 인생에 뭐가 없어서 괴로운 게 아니라, 내 인생에 너무 쓸모없는 요소가 자잘 자잘 가득 차 있어서 괴로운 거였다. 첫 직장을 다닐 땐 '맞지 않는 회사'라는 돌덩어리가 내 인생을 꽉 채우고 있었고,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았을 땐 정신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 놓지를 못했다.


가진 걸 놓기란 정말 어렵다. 지금 있는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도 인생이 불행한데 이것마저 없으면 나란 인간은 정말 더 별 볼일 없어지는 거 아닐까 싶어 지기 때문에. 그런데 이미 꽤 열심히 살았고 그 결과로 많은 걸 얻었는데도 불행하다면, 그땐 뭔가를 더할 때가 아니라 뺄 때라는 걸 이번에서야 알았다.


사실 첫 번째 직장을 놓을 땐, 인생이 불행하긴 했는데 그래도 못 견딜 만큼은 아닌 잔잔바리 불행이었다. 내가 마치 끓기 직전의 물에서 헤엄치는 개구리 같았다. 물이 100도로 끓으면 '어이쿠 뜨거워'하면서 얼른 빠져나올 텐데, 또 그 정도는 아니어서 '빼기'를 선택하기가 더 어려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갉아먹는 그 잔잔한 불행에서 좀 더 빨리 탈출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회사를 관둘 땐 내가 불타는 용암 안에 있어서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빼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유일하게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우울증에 걸려 퇴사를 하고, 계속 낫지 않고, 급기야는 턱이 찢어지고, 우울증이 심해지고, 이 모든 일을 겪어내면서 내 인생은 반쯤 망한 걸까? 하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살아지게 되어있지'라고 알고 있었지만 서른이 넘어 뭣도 없이 갑자기 이상한 병에 걸린 백수가 되고 나니 '물론 살긴 살겠지만 내가 계속 내일이 살고 싶지 않으면 어떡하지?' 했다.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게 진짜 망해버린 삶 아닐까?' 하고.


처음엔 어떻게라도 '잘'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했으나, 나중엔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버려라! 다 망해버려라!' 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인생이 생각보단 망하지 않았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것들, 예를 들면 회사, 평소에 힘겨웠던 인간관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이런 것들을 모두 놓아버리니 나에게 더 잘 맞는 것들이 내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충 서류를 내고 잊어버렸던 회사에서 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오고, 알던 동료가 같은 회사에서 일해보자며 스카우트 제의가 오고, 또 스카우트 제의는 놓치면 다음이 없을 것 같아 부랴부랴 계약서를 썼더니, 또 다른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의 제의가 들어왔다. 결국엔 내가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때 서두르지 않고 기회를 놓아 보냈다면 현실적으로 더 좋은 조건으로 다른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거다.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는 끝까지 알 수가 없다.


회사를 다니며 원하던 대학원에 붙어 뛸 듯이 기지만 2년이 지난 후, 나는 모든 성취를 빠르게 진행해온 대가로 우울증을 얻게 되었다. 우울증 때문에 퇴사를 하고 쉬고 있었기에 동료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동료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버렸기에 더 좋은 조건의 계약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생은 새옹지마여서 그 순간에는 길(吉)이라 느껴졌던 일이 흉(凶) 일 수도 있고, 흉(凶)이라 생각했던 일이 길(吉)이 될 수도 있다.


오늘도 고작 클라이언트와의 견적서 하나로 끙끙대며 온갖 자책을 하는 부족한 나이지만, 글을 쓰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급할수록, 마음이 불안할수록, 불행할수록, 더하는 게 아니라 빼야 한다. 맞지 않는 걸 버려야지만 더 좋은 게 찾아올 자리가 생긴다. 그러니 너무 꽉꽉 채워 살려고 하지 말자. 삶에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적당히 물렁하게, 적당히 게으르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