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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Sep 08. 2021

청춘들의 비 내리는 밤

청춘과 맥주와 비의 상관관계


어제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는 유독 생각나는 밤이 있다. 그 당시엔 별 생각이 없었으나 지나고 보면 아름답고도 아릿하게 남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날 밤도 이런 날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의 하찮아 보이는 일상도 몇 십년이 지난 후에는 '청춘이었구나' 하며 새삼스러워 할 테지만, 그 날 밤의 나와 H언니는 '청춘'이라는 단어와 가장 닿아 있지 않았을까 싶다.


H언니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언니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다면 '강한나'라고 지어주고 싶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스무살 초 햇병아리일 무렵 언니는 이미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졸업반이었으므로 더 강한 어른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별다른 열정도 꿈도 없이 물러터졌던 나와는 다르게 H언니는 모든 것에 확신과 에너지가 넘쳤다. 언니는 회사에서 첫 여성 임원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거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더욱이나 여성 임원이 없었다. 사실 '여성 임원'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좀 웃기다. 남성 임원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보통 '남성 임원'이라던가 '남자인데 임원이 됐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가 임원이 되면 이 사람이 얼마나 '여성성'과 '모성'을 버리면서까지 '임원'이 되어내고 말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도 남성 임원에 대해서는 이 사람의 '남성성'과 '부성', 커리어적인 '성공'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아무튼 언니는 '여성 임원'이라는 특별한 단어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반드시 그 특별한 존재가 되어보겠노라 선언했다.


한 번에 대기업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H언니는 한동안 회사 생활을 즐기는 듯 보이더니 갑자기 이름도 모를 작은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다. 좀 더 말랑한 분야에서 서비스를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이유였다. 서비스 기획과는 큰 연관도 없던 곳에서 일하던 언니가 난데없이 잔 다르크마냥 '서비스 기획자'라는 깃발을 펄럭이고 나타나더니 본인 앞의 모든 길을 '서비스 기획자'에 맞게 우르르 재정렬하는 걸 보면서 언니는 내 우상이자 롤모델이 됐다. 사측의 일방적 해고에도, 형편 없이 깎여 나간 월급 속에서도, 모든 걸 인내하며 꿈을 쫒아 달려가는 H언니가 빽빽한 열대 우림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아마존 여전사처럼 보였다.


H언니와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꽤 오래도록 학교 앞에서 살았다. 졸업장을 받아들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쩐지 학교 앞이 마음의 고향같아 떠나지를 못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자리를 잡은 우리에게 학교 앞은 유일하게 서울에서 '집'으로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학교 앞을 떠나는 순간 정말로 제 구실을 하는 어른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아 학교 앞에서 계속 학생처럼 살았다. 동네 주민이었던 H언니와 나는 학교 축제가 있는 주말이면 대학생인 냥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응원가를 부르고 혼자 있는 밤이 먹먹할 때면 서로를 찾아 술을 마셨다.


이 날도 아마 둘 중 누군가의 마음이, 혹은 둘 다의 마음이 먹먹해 서로를 찾은 날이었을 거다. 언니는 그토록 원하던 업계에서 일하게 되었고 별 욕심 없던 나도 얼렁뚱땅 취업에 성공해 따박따박 월급을 받게 되었으나 왠지 이전보다 인생이 자주 공허하고 텅텅 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쯤해서 H언니는 '여성 임원'에 대한 꿈을 차차 내려놓았고 나는 맞지 않는 업무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나에게 딱 맞는 자리'라며 뻐끔뻐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세뇌하고 있었다.


H언니가 있다는 학교 앞 작은 술집에 도착해보니 이미 언니는 혼자 맥주 한 잔을 하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당시 만나던 남자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면서도 지금의 일상이 썩 나쁘지 않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니,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진짜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날개 끝이 잘린채로 새장에 갇힌 기분이었는데도 날게 되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면서 현재를 합리화했다. H언니는 본인은 길을 잃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여전사같은 언니가 길을 잃었다고 하니 나도 할말을 잃었다. 그래도 언니는 날개가 있으니 다시 날 수 있겠지, 언니의 날개는 튼튼하니까 괜찮아질테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언니가 갑자기 본인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H언니의 아버지는 언니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으로, 꽤나 큰 기업에서 오랫동안 임원까지 해내신 분이다. 어찌 보면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는 '여성 임원'의 꿈을 진심으로 지지해 준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도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얼마 전, 어머니에게서 처음 듣는 소식을 접했다 했다.


내용인 즉슨, 아버지가 잠시 휴직을 하셨을 때가 있는데 알고 보니 그 때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하셨다는 거였다. 어머니가 방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실행에 옮기고 계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를 뜯어말렸고, 그날로 아버지는 휴직을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나 강해보였던 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끝내고 싶어했을 만큼 벌어 먹고 사는게 녹록치 않다는 걸 느껴버린 H언니는 어딘가 좀 허망해 보였다.


맥주만으로 만취한 날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기다랗게 늘어진 바 테이블에 H언니와 나란히 앉아 맥주를 홀짝홀짝 넘기는데 자꾸만 비가 주룩주룩왔다. 허한 마음이 맥주로 채워질까 싶어 연거푸 '짠!'을 외쳤는데 언니가 아버지 이야기를 한 다음부터 내 눈에서도 마음에서도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언니, 사실 우리 엄마도 아파. 나랑 동생을 다 키워놓고 아픈데 이젠 의사도 원인을 모른대.


빽빽 우는 나와 언니를 키워냈을 부모님의 청춘을 생각하고, 우리네의 청춘을 생각했다. 그치치 않고 퍼붓는 빗줄기가 현실감이 없었다. 엄마 아빠의 청춘을 잡아먹고 자라내 청춘은 좀 더 반짝거렸으면 좋겠는데 청춘이 먹먹하기만 해서 우리는 자꾸만 울고 싶었다.


어제처럼 또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에는 그 날이 떠오른다. 청춘이어서 힘든 날이었다, 나만 모르게 충분히 빛났던 날들이었다, 하고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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