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왕 / 연금술 / 영원한 빚의 굴레
재인아. 네덜란드의 튤립 거품이 꺼진 후, 나는 배를 타고 도버 해협을 건넜단다. 1694년의 런던. 그곳은 암스테르담보다 더 축축하고, 더 어둡고, 무엇보다 훨씬 더 절박한 냄새가 나는 도시였어. 석탄 연기가 섞인 누런 안개(Smog)가 템스강을 덮고 있었고, 거리마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가득했지.
이번에 나는 런던의 금융가, 롬바드 스트리트 근처에서 작은 '커피하우스'를 운영하는 주인이었어. 당시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었단다. 주식 브로커, 선주, 상인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험담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정보의 거래소'였지.
어느 날, 내 가게에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왔어. 아니, 정확히는 귀하지만 '빈털터리'인 손님들의 대리인이었지. 바로 국왕 윌리엄 3세의 재무 관료들이었어.
당시 영국은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9년째 전쟁을 하고 있었어. 전쟁은 돈을 먹는 하마란다. 화약도, 군함도, 병사들의 월급도 다 바닥난 상태였지. 왕은 런던의 금세공업자(Goldsmith)들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들은 코웃음을 쳤어. "찰스 2세 때도 돈을 떼먹히지 않았소? 왕의 약속은 믿을 수 없소."
국가는 파산 직전이었고, 프랑스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지. 재무 관료들은 내 가게 구석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어. "8% 이자를 준다고 해도 아무도 돈을 안 빌려주는군. 이제 끝이야. 영국은 망했어."
그때였어. 커피하우스의 문이 열리고, 차가운 안개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왔단다. 큰 키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듯한 호박색 눈동자.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튤립 버블을 설계하고 사라졌던 그 남자, 발레리우스였어. 하지만 이곳에서는 자신을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이라고 소개하더구나.
그는 아주 세련된 영국 신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지. 그 옷감에서 나는 냄새를. 피렌체의 장부 냄새, 암스테르담의 운하 냄새, 그리고 리디아의 금속 냄새가 섞인 그 지독한 '돈의 악취'를 말이야.
그가 절망에 빠진 관료들의 테이블로 다가갔어. "신사분들, 표정이 어둡군요. 폐하의 금고가 비었습니까?"
관료 하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어. "누구요? 우린 지금 상인 나부랭이와 농담할 기분이 아니오. 120만 파운드가 당장 필요한데, 국고엔 쥐새끼만 돌아다닌단 말이오."
그 남자가 얇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어. "제가 빌려드리죠. 120만 파운드 전액을."
가게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어. 나도 커피 잔을 닦던 손을 멈췄지. 120만 파운드?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였어.
"당신이? 무슨 수로? 그 액수에 걸맞는, 당신이 원할 만한 담보가 우리에게 있기는 있소?"
"담보는 필요 없습니다. 원금을 갚을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매년 8%의 이자만 꼬박꼬박 주시면 됩니다."
관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어. 미친 사람이거나 구세주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조건이 뭐요? 세상에 공짜는 없을 텐데."
그 남자가 품에서 양피지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어. 그것은 단순한 차용증이 아니었어. 인류 역사를 영원히 바꿀 '악마의 설계도'였지.
"조건은 간단합니다. 저와 제 동업자들에게 '영란은행(The Governor and Company of the Bank of England)'이라는 회사를 만들 권리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힐끔 쳐다보았어. 마치 '잘 봐, 할머니. 이게 내 진짜 마술이야'라고 말하듯이.
"그리고 정부가 갚아야 할 빚(국채)을 담보로, 우리 은행이 독점적으로 '은행권(Banknote)'을 발행하게 해주십시오."
재인아, 이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감이 오니? 이전까지 돈(화폐)은 왕이 금으로 만드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 남자는 지금, '왕의 빚'을 담보로 민간 상인들이 '종이돈'을 찍어내겠다고 제안한 거야.
관료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어.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멀었지. "좋소! 종이 쪼가리를 찍든 말든, 당장 120만 파운드만 가져온다면 왕실의 인가를 내주겠소."
그 남자는 펜을 들어 서명했어.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마치 내 심장을 긁는 것 같았지. 그날 런던의 롬바드 스트리트 커피하우스에서, 국가(State)와 자본(Bank)이 결혼식을 올린 거야. 가장 추악하고, 가장 강력한 부부의 탄생이었지.
재인아. 그 남자, 윌리엄 패터슨(사실은 그놈)의 제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어. 1694년, 국왕 윌리엄 3세는 '특허장(Royal Charter)'에 도장을 찍어주었지. 이로써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단다.
자, 이제 이 은행이 어떻게 '무(無)'에서 돈을 만들어냈는지, 그 기가 막힌 사기극의 메커니즘을 설명해줄게. 잘 들어봐.
우선 패터슨과 그의 부유한 친구들은 120만 파운드의 금(Gold)을 모아서 정부에 빌려줬어. 정부는 그 돈으로 군함을 띄우고 프랑스와 전쟁을 했지.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대출이야.
하지만 진짜 마법은 그다음부터였어. 왕은 패터슨에게 특별한 권한을 줬다고 했지? 바로 '은행권 발행권'.
영란은행은 정부에 빌려준 120만 파운드어치의 '영수증(국채 증서)'을 금고에 고이 모셔두었어. 그리고 그 영수증을 근거로, 똑같은 액수인 120만 파운드어치의 '종이돈(Banknote)'을 찍어내서 민간에 대출해주기 시작한 거야.
재인아,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니? 원래 있던 금은 정부가 가져가서 전쟁터에서 다 써버렸어. 금고는 비어 있거나, 정부가 써준 '차용증'만 들어있지. 그런데 은행은 그 차용증을 믿고 또 다른 120만 파운드를 시장에 푼 거야.
세상에 돈이 순식간에 두 배가 된 거지. 하나는 정부가 쓰는 돈, 하나는 은행이 민간에 빌려준 돈. 하지만 그 돈을 뒷받침하는 금은 원래의 120만 파운드뿐이었어. 이것이 바로 현대 은행 시스템의 핵심인 '부분지급준비제도'의 시초이자, '신용 창조(Credit Creation)'의 시작이란다.
나는 내 커피하우스에서 패터슨이 상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떠드는 소리를 들었어. "여러분, 이 은행권은 금이나 다름없습니다. 왕이 보증하는 빚이니까요. 무거울 금화를 들고 다니지 마세요. 이 종이 한 장이면 런던 어디서든 결제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했어. "와, 나라에서 보증하는 은행이라니! 내 돈은 안전하겠군." 상인들은 앞다퉈 영란은행에 계좌를 텄고, 은행이 찍어낸 종이돈은 런던 거리를 뒤덮었지.
경기는 좋아진 것처럼 보였어. 시중에 돈이 두 배로 풀리니 장사도 잘되고 주가도 올랐으니까. 하지만 재인아, 내가 뭐라고 했지? 공짜 점심은 없다고.
정부는 패터슨에게 빌린 돈에 대해 매년 8%의 이자를 줘야 했어. 그 이자는 어디서 났을까? 왕이 자기 주머니를 털었을까? 아니지.
정부는 '톤세(Tonnage Act)'라는 새로운 세금을 만들었어. 배의 짐칸 용량(톤)에 따라 세금을 매기고, 맥주와 술에도 무거운 주세를 때렸지. 결국 런던의 부두 노동자, 선원, 내 커피하우스의 단골들이 마시는 맥주 한 잔 값에, 패터슨에게 바쳐야 할 이자가 포함된 거야.
어느 날 저녁, 패터슨이 내 가게에 혼자 남았을 때 내가 물었어. "당신, 정말 천재적이군. 금은 한 번만 있었는데, 정부한테 이자 받고 민간한테 또 이자를 받다니. 이중으로 빨대를 꽂았어."
그가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커피를 마시며 웃더구나. "할머니,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정부는 원금을 갚을 생각이 없다는 거야."
"뭐라고?"
"생각해봐. 원금을 갚으면 내가 찍어낸 은행권을 다시 회수해야 해. 그럼 시중에 돈이 말라버리고 경기가 폭락하겠지. 정부도 그걸 원치 않아. 그들은 영원히 이자만 낼 거야. 그리고 나는 영원히 그 나라의 주인으로 남겠지."
그의 말이 맞았어. 이때부터 '국채(National Debt)'라는 개념이 생겼어. 과거에는 왕이 죽으면 빚도 사라지거나 떼먹혔지만, 이제는 '영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빚은 영원히 굴러가게 된 거야. 그리고 그 빚이 늘어날수록, 은행가들의 배는 더 불어나는 구조가 완성됐지.
패터슨은 창밖의 런던탑을 바라보며 속삭였어. "화폐는 더 이상 금속이 아니야. 화폐는 국가가 국민에게 지는 '빚'이야. 빚이 많을수록 돈이 많아지는 세상. 어때, 아름답지 않나?"
나는 소름이 돋았어. 그는 그저 은행을 만든 게 아니었어. 국가라는 거대한 숙주에 영원히 빨대를 꽂고 피를 빠는 기생충, 아니 '시스템'을 심어놓은 거야.
하지만 이 남자의 욕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 "영국은 너무 좁아. 좀 더 화끈하고, 좀 더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해."
그는 주머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어. 프랑스 지도가 아니었어. 저 멀리 신대륙, 아메리카의 미시시피 강이 그려진 지도였지.
"내 친구 중에 존 로(John Law)라는 친구가 있어. 도박꾼에 살인자 수배범이지만, 머리 하나는 비상하지. 그 친구가 프랑스에서 아주 재미있는 판을 벌일 거야."
재인아. 영란은행이 설립되고 몇 년이 지나자, 런던 사람들은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어. 분명히 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나라는 부강해졌다는데,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는 거야. 물가는 슬금슬금 오르고, 세금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지.
당연하지. 정부가 발행한 국채는 갚는 게 아니라 '돌려막기(Refinancing)'하는 거였으니까. 만기가 돌아오면 또 다른 국채를 발행해서 갚고, 이자는 세금으로 충당하고... 그 과정에서 영란은행은 수수료를 챙기고, 통화량을 늘려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어.
내 커피하우스 단골이었던 늙은 선장 하나가 맥주잔을 던지며 소리쳤던 게 기억나. "빌어먹을! 맥주값이 또 올랐어. 우리가 프랑스 놈들을 이겼는데 왜 내 지갑은 더 얇아지는 거야?"
나는 카운터 구석에서 패터슨을 노려보았어. 그는 여전히 우아하게 신문을 읽고 있었지. 그는 내 시선을 느끼고는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
"할머니, 백성들이 불평하는군."
"당신 때문이잖아. 없는 돈을 찍어내서 물가를 올렸으니까."
"아니지. 나는 유동성을 공급했을 뿐이야. 덕분에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거야. 군함을 더 많이 찍어낼 수 있으니까."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영국은 영란은행 덕분에 무제한에 가까운 전비를 조달할 수 있었고, 결국 나폴레옹 전쟁까지 승리하며 세계 제국이 되었지.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어. 영국 국민들은 평생 갚아도 줄지 않는 '국가 부채'의 이자를 갚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해야 했으니까.
"이봐, 패터슨. 당신의 이 시스템... 결국은 터지지 않을까? 빚으로 쌓아 올린 탑이잖아."
그가 호박색 눈을 빛내며 대답했어. "물론이지. 언젠가는 터져. 하지만 걱정 마. 터질 때쯤이면 나는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을 테니까."
그는 런던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어.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혹은 또 다른 자아일지도 모르는 한 남자를 프랑스로 보냈어. 스코틀랜드 출신의 천재적인 도박꾼, 존 로(John Law).
패터슨이 내게 속삭였어. "영란은행은 너무 보수적이야. 금이 100 있으면 200 정도만 찍어내잖아. 점잖은 신사들이라 겁이 많아. 하지만 프랑스는 달라. 거긴 지금 루이 14세가 죽고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든. 절박한 사람은 무엇이든 믿게 되어 있지."
"무슨 짓을 하려고?"
"금을 아예 없애버릴 거야. 금 따위는 창고에 한 톨도 없어도 돼. 오직 '미래의 환상'만 있으면 돈을 무한대로 찍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미래의 환상?"
"미시시피 강. 그곳에 가면 금광이 널려 있다고 거짓말을 할 거야. 사람들은 그걸 믿고 돈을 맡기겠지. 나는 그 믿음을 담보로 종이를 찍어내고. 어때? 튤립보다 훨씬 거대하지 않나? 이번엔 꽃 한 송이가 아니라, 대륙 하나를 통째로 파는 초대형 쇼야."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커피하우스를 나섰어. 그의 뒷모습 뒤로 런던의 안개가 더욱 짙게 깔렸지. 나는 알았어.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거대한 은행 건물과, 영원히 멈추지 않을 빚의 톱니바퀴뿐이라는 걸.
재인아. 영란은행은 지금도 런던 그 자리에 서 있단다. '노부인(The Old Lady)'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말이야. 사람들은 그곳이 금융 안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믿지. 하지만 그 지하 금고의 첫 번째 벽돌을 놓은 게 누구인지, 그리고 그 시멘트에 섞인 것이 무엇인지(국가의 빚과 서민의 세금)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자, 이제 런던의 칙칙한 안개를 벗어나 보자.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이 있는 프랑스 파리로. 그곳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가장 파괴적이었던 버블. 미시시피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