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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 너머 섬세함으로

예민함과 섬세함

     

 예민함edgy과 섬세함considerate 무엇인가? 예민함과 섬세함. 이 두 가지 마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왜 그런가? 예민함과 섬세함은 민감함sensitive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민한 이들도 민감한 마음 상태에 있고, 섬세한 이들도 민감한 마음 상태에 있다. 하지만 이 두 마음은 분명히 다르다. 더 정확히 말해, 이 두 마음은 서로 반대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민함과 섬세함은 어떻게 다른가? 예민함과 섬세함은 모두 민감한 마음이지만 그 민감함이 향하는 대상은 다르다. 예민함은 자신을 향하고, 섬세함은 타자를 향한다. 즉, 예민함은 자기-민감성이고, 섬세함은 타자-민감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민한 이들은 자신의 상태에 민감하다. 자신의 신체(건강) 상태나 감정 상태 혹은 자신의 삶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예민’하다. 반면 섬세한 이들은 타자의 상태에 민감하다. 타자의 신체(건강) 상태나 감정 상태에 혹은 타자의 삶에서 벌어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섬세’하다.     


예민함과 섬세함은 반비례한다

     

 예민함과 섬세함에 관한 오해가 있다. 이 둘이 비례 관계에 있다는 믿음이다. 즉, 더 예민할수록 더 섬세하고, 덜 예민할수록 덜 섬세하다는 믿음이다. 지극히 예민한 이들이 자신이 꽤나 섬세하다고 믿는 경우는 흔하다. 온통 자신의 상태(신체·감정·문제)만을 민감(예민)하게 살피는 이가 상대를 민감(섬세)하게 읽고 있다고 오해하는 경우는 얼마나 흔하던가? 이런 경우는 모두 예민함과 섬세함이 비례 관계에 있다는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삶의 진실은 정반대다. 예민함과 섬세함은 반비례 관계에 가깝다. 더 예민할수록 덜 섬세할 가능성이 크고, 덜 예민할수록 더 섬세할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더 섬세해질수록 덜 예민할 가능성이 크고, 덜 섬세해질수록 더 예민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주변에 있는 예민한 혹은 섬세한 이들의 일상이 이런 삶의 진실을 매우 잘 보여준다.  

 

 작은 소리나 냄새 혹은 자기계획에 예민한 이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온 마음이 자신에게만 향해 있다. 자신의 상태(신체‧감정‧문제)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타인을 섬세하게 읽기는커녕 타인에게 관심조차 없다. 반면 섬세한 이들은 어떤가? 이들은 자신의 상태에 초연하기에 타인의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처럼 타인의 상태를 섬세하게 읽으려는(읽지 않으려는) 만큼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덜(더) 관심을 갖게 된다. 즉, 자신에게 민감(예민)할수록 타인에게 둔감해질 수밖에 없고, 타인에게 민감(섬세)할수록 자신에게는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 : 비대한 예민함, 왜소한 섬세함

     

 예민함과 섬세함은 피해의식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피해의식은 어떤 상태인가? 예민함이 비대해진 상태이고, 섬세함이 왜소해진 상태이다. 즉,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민감하기에 타인에 대한 민감성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피해의식은 상처받은(혹은 받았다고 믿는) 기억으로 인한 ‘자기’방어다. 즉, 피해의식은 ‘나’를 방어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과도하게 예민한 이유다.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온통 ‘나’에게 민감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직장 생활 진짜 못 해먹겠다.” ‘종찬’은 친구를 만나 직장 생활의 억울함과 부당함, 부조리에 대해 하소연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답했다. “너만 그렇겠냐? 직장 생활이 다 비슷하지 뭐.” 이는 사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이다. 아니 어쩌면 친구는 나름대로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찬’은 친구의 말에 갑자기 화를 냈다. “너 직장 그만두고 자기 사업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

     

 ‘종찬’은 왜 그랬을까? 피해의식 때문이다. ‘종찬’은 직장 생활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하다. 왜 그럴까? ‘종찬’은 직장에서 억울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종찬’의 피해의식은 크고 짙을까? ‘종찬’의 비대한 예민함 때문이다. ‘종찬’은 온통 자신의 문제에만 시선이 쏠려 있기에 직장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예외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종찬’이 심한 피해의식을 갖게 된 이유다.


      

예민함-피해의식의 악순환

     

 예민함과 피해의식은 상호작용한다. 예민함은 피해의식을 증폭시키고, 그렇게 증폭된 피해의식은 다시 예민함을 증폭시킨다. 이런 예민함-피해의식의 악순환 속에서 섬세함은 점점 더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종찬’의 맥락 없는 분노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종찬’은 예민함-피해의식의 악순환 속에 있다. 그 사이에 섬세함은 점점 더 쪼그라들어 ‘종찬’은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종찬’이 친구의 격려와 위로의 말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다른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돈‧학벌‧외모 등등 어떤 피해의식이건, 피해의식은 반드시 예민함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예민하면 피해의식이 강화되고, 피해의식이 강화되면 예민해진다. 온통 ‘나’의 문제(돈 없는 ‘나’, 학벌이 형편없는 ‘나’, 못생긴 ‘나’)에만 몰두해 있는 이들은 (돈‧학벌‧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런 피해의식에 잠식당하면 더욱 ‘나’의 (돈‧학벌‧외모에 대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섬세함은 점점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온통 ‘나’의 (돈‧학벌‧외모에 대한) 생각뿐인 이가 어떻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들의 상태를 민감하게 읽을 수 있겠는가?  


   

 예민함-피해의식의 악순환이 만들어내는 섬세함의 결여. 이것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마저 슬픔에 빠뜨리는 원인이다. 가장 큰 개인적 슬픔은 무엇인가? ‘사랑 없음’이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때 한 개인은 가장 큰 슬픔에 빠진다. 왜 ‘사랑 없음’의 상태에 빠지는가? 섬세함의 결여 때문이다. 온통 ‘나’에게만 관심이 쏠려 피해의식에 잠식당하고, 그로 인해 ‘너’에게 어떤 관심도 갖지 못할 때 사랑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랑은 고사하고 작은 기쁨을 주는(혹은 줄 수 있는) 이들과의 대화조차 요원하다. 이보다 더 큰 개인적 슬픔이 어디 있겠는가?   

  

 공동체적 슬픔 역시 마찬가지다. 예민함-피해의식의 악순환 속에 있는 공동체를 생각해보라.  구성원 모두가 ‘나’의 상태(상처와 아픔)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너’의 상태를 읽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공동체는 셋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무관심의 공동체이거나 적대적인 공동체이거나 위선적인 공동체이거나.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보자. 이들은 자신의 외모만을 살피느라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된다(무관심의 공동체). 만약 이들이 서로에게 무관심하지 않다면, 이들은 외모에 대한 과잉된 관심으로 서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적대적인 공동체). 무관심으로 인한 외로움, 적대성으로 인한 피로함을 피하고 싶을 때 이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척 위선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위선적인 공동체). 이 세 가지 경우 중 어떤 경우도 기쁨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 예민함-피해의식의 악순환은 이처럼 개인적 슬픔 너머 공동체적 슬픔까지 만들게 된다.      


어떻게 피해의식을 넘어설 것인가?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을 넘어설 즉각적인 답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민함의 제거다. 이 즉각적인 답은 옳은가? 그렇지 않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민함은 분명 피해의식을 증폭시키는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이다. 예민함을 제거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러니 예민함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부정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이든 예민함과 섬세함을 모두 갖고 있다. 이는 ‘자기보존’과 ‘타자공감’이라는 인간의 두 가지 보편적 조건이 이미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든 예민함으로 자신을 보존하려하며 동시에 인간은 누구든 섬세함으로 타자와 공감하려 한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예민해지거나(자기보존) 섬세해질(타자공감) 뿐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예민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상태다, 쉽게 말해, 예민해져야 할 때 예민해지고, 섬세해져야 할 때 섬세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자신에게 민감해져야 할 상황과 조건이 있다. 예컨대 몸이 아프거나 운동을 하거나 사색을 할 때가 그런 경우다. 이때는 마음의 중심을 섬세함에서 예민함 쪽으로 옮겨야 한다. 반대로 타자에게 민감해져야 할 상황과 조건이 있다. 예컨대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사랑을 나눌 때이다. 이때는 마음의 중심을 예민함에서 섬세함 쪽으로 옮겨야 한다. 이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라 예민함과 섬세함 사이를 횡단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균형은 중간이 아니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중간에 서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양쪽의 무게를 잘 가늠해 순간순간 중심을 적절히 옮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예민함과 섬세함이 모두 있다. 하지만 그 둘의 무게는 같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예민함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혼자 있든 타인과 함께 있든 우리의 마음은 대체로 예민함 쪽으로 기울여져 있다. 그러니 예민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섬세함 쪽으로 조금 더 중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랑이 확장되는 만큼 피해의식은 그 영토를 잃는다.      


 어떻게 피해의식 너머 기쁨 넘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사랑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나’의 상처가 아니라 ‘너’의 상처에 아파하는 일이다. ‘나’가 아닌 ‘너’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들은 피해의식에서 이미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다. ‘너’의 상처에 아파하며 ‘너’를 보호해주고 싶은 이가 어떻게 ‘나’의 아픔만을 보느라 ‘나’를 과도하게 방어(피해의식)하려 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민함에서 눈을 떼고 조금 더 섬세해져야 하는 이유다. 섬세함이 없다면 사랑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예민한 이들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대해진 예민함으로는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 섬세한 이들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가 아닌 ‘너’를 민감하게 읽으려는 이들은 언제나 잠재적 사랑 앞에 있다.  

     

 예민함은 슬픔의 조건이 되고, 섬세함은 기쁨의 조건이 된다. 예민함은 자기-사랑의 토대이고, 섬세함은 타자-사랑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사랑하려는 이들은 (잠시는 기쁠 수는 있겠으나) 결국 필연적으로 공허와 허무의 세계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반면 타자를 사랑하려는 이들은 (잠시는 고통스러울 수 있겠으나) 결국 필연적으로 따뜻하고 가득 찬 세계에 가닿게 된다.  

    

 피해의식을 넘어서고 싶은가? 예민함에서 섬세함으로 중심을 옮겨야 한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피해의식을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다. 자기-사랑을 줄이고, 타자-사랑을 늘려 나가는 만큼 피해의식을 넘어설 수 있다. 그렇게 ‘나’의 기쁨 너머 ‘너’의 기쁨으로, 더 나아가 ‘우리’의 기쁨으로 커져갈 수 있다. 섬세함이 확장되는 만큼 사랑은 그 영토를 확장한다. 사랑이 확장되는 만큼 피해의식은 그 영토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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