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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거나 싸우거나 I

피해의식은 비합리적 보상 심리다. 

죽음의 해변에 서 있는 아이들

    

덴마크 군인들이 소년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놀이하듯 소년들의 입에 오줌을 싼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덴마크 군인인 ‘칼 상사’는 그 소년들을 어느 해변의 지뢰밭으로 내몰고 있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온몸이 조각날 위험천만한 백사장 지뢰밭에서 지뢰 제거를 시키고 있다. 그는 몸이 아파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아이들마저 지뢰밭으로 몰아넣는다. 몇몇 아이들은 지뢰를 제거하려다 온몸이 조각나 죽임을 당했다.  

    

 <랜드 오브 마인>이라는 영화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허구가 아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어떤 감정이 들까? 분노일까? 사이코패스 같은 덴마크 군인들과 피도 눈물도 없는 ‘칼 상사’에게 분노하게 될까? 사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영화를 본 이들은 복잡미묘한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나치)군은 덴마크를 침공해서 덴마크인들을 참혹하게 살육했다. 독일군은 적들의 상륙을 막기 위해 덴마크 해안에 약 200만 개의 지뢰를 설치했다. 이것이 덴마크의 어느 아름다운 해변이 죽음의 지뢰밭이 된 이유였다. 독일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그 해변의 지뢰는 독일군이 제거해야만 했다. 이것이 독일 소년병들이 죽음의 해변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우리는 덴마크 군인들의 광기를 그저 비난할 수 없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와 가족을 강간하고 학살한 독일군 아닌가? 덴마크인들이 그런 독일군 소년병들에게 어찌 친절할 수 있겠는가? ‘칼 상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치군이 설치한 지뢰를 나치군에게 제거하라고 하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이것이 ‘칼 상사’의 마음이다. 자기 나라 해변을 죽음의 지뢰밭으로 만든 것은 독일군 아닌가? 그러니 그 지뢰를 제거하는 일도 응당 독일군의 책임 아닌가? 그러니 독일 소년병들에게 지뢰 제거를 시키는 것은 비인간적인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 아닌가?      



피해의식은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아니 이 역사적 사실은 우리를 감정적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독일 소년병들이 안쓰럽고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덴마크 군인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할 수만도 없다. 독일이 먼저 덴마크에게 참혹한 상처를 주지 않았다면, 덴마크 군인들이 소년병들에게 그처럼 악랄하게 굴 일은 애초에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덴마크 군인들을 마냥 두둔할 수도 없다. 사실 독일 소년병들은 이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독일군에게 불리한 전황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징집된 아이들일 뿐이니까.    

  

 불편한 삶의 진실이 있다.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피해의식을 갖게 된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 피해의식은 광기 어린 폭력성을 띤다. 왜 그런가? 피해의식은 언제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 군인들과 ‘칼 상사’의 광기 어린 폭력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그들은 참혹한 상처를 입어서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갖게 되었다. “아이든 뭐든 상관없어. 독일인이면 모두 죽어도 싸!”     


 조금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소년병들은 그 전쟁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아이들 역시 독일군의 피해자일 수 있다. 집과 학교에서 사랑받으며 지내야 할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징집되어 전장으로 끌려 나온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그런 합리성의 눈을 가린다. 피해의식은 시꺼먼 보상 심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인들의 광기 어린 폭력은 그 비합리적 보상 심리 안에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이는 서글픈 인간의 역사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시오니즘’이라는 피해의식

     

 전쟁은 끝나도 피해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누가 뭐래도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던 독일(나치)군의 만행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로서의 유대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시오니즘Zionism’이 지금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시오니즘’이 무엇인가? 이는 유대인들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다시 민족 국가를 건설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이다(‘시온Zion’은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고어다).   

        

 시오니즘은 나치의 광기 어린 폭력과 닮아 있다. 일부 유대인(시오니스트)들은 2000년 전에 떠나온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땅)에 민족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그곳에서 2000년 가까이 살아온 아랍계 사람(팔레스타인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고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전쟁과 테러, 암살 등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어느 지역(‘가자 지구’)에 몰아넣고 학살이라 불러도 좋을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가자 지구’를 보며 거대한 ‘아우슈비츠’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 걸까?      


 일부 유대인들(시오니스트)은 '피해자'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을까? 이유는 하나다. 바로 자신이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해는 자신이 엄청난 피해자이니, 자신이 행하는 어떤 폭력도 괜찮다는 무의식적 정당화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상처는 나치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사고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시오니스트들은 이런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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