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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거나 싸우거나 II

진짜 가해자와 싸워라

우리 시대의 피해의식


 거대한 역사 속에서 피해의식은 인간의 삶을 착취해왔다. 이는 전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역사적 이야기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시대에는 우리 시대의 피해자가 있다. 자본의 피해자, 성역할의 피해자를 생각해보라.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인격적 모멸을 당해야 했던 이들이 있다. 이들은 명백한 피해자다. 자본의 피해자. 그들 중 대다수는 결코 선하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손쉽게 정당화한다. 이는 그들이 비합리적 보상 심리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성역할의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여성(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불이익을 받아야만 했던 이들이 있다. 이들 역시 명백한 피해자다. 성역할의 피해자. 그들 중 대다수는 결코 선하지 않다. 단지 남성(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적대시한다. 또 그런 적대감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폭력을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손쉽게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역시 그들이 비합리적 보상 심리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인 혹은 시오니스트처럼, 이들 역시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피해의식으로 인한 비합리적 보상 심리에 잠식당한 이들은 언제나 그럴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피해자들의 피해의식(비합리적 보상 심리)에 대해서 손쉽게 비난할 수 없다. 누군가 덴마크인과 시오니스트의 광기를 손쉽게 비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덴마크인 혹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일 뿐이다. 누군가 자본주의적 피해의식과 성차별적 피해의식을 손쉽게 비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자본과 성차별에 의해 상처받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사랑하거나 싸우거나

     

 그렇다면 피해자의 피해의식(비합리적 보상 심리)을 무작정 용인할 것인가? 그럴 수도 없다. 피해의식은 또 다른 피해의식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에 휩싸인 피해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다. 피해의식에 휩싸였다면 사랑하거나 싸워야 한다. 피해의식을 치유하는 데 그 두 가지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사랑부터 이야기해보자. 사랑은 어떻게 피해의식을 치유하는가? 다시 영화 <랜드 오브 마인>으로 돌아가 보자. “모두 내려. 빨리. 이쪽이다. 여기서 500미터 가면 국경선이다. 그곳을 지나면 독일이다. 뛰어.” 영화가 끝날 무렵 악랄했던 ‘칼 상사’는 아이들에게 온화한 표정으로 말한다. ‘칼 상사’는 독일 소년병들을 트럭에 태워서 독일 국경선 근처에 내려준다. 그리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준다. ‘칼 상사’는 ‘사랑’으로 치유되고 있다.      


 ‘사랑’은 무엇인가? 이념, 종교, 자본을 넘어 한 사람을 보는 일이다. ‘칼 상사’는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나치군 너머의 한 사람을 보았다. 그렇게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의식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일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가 깊을수록 증오도 깊다.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깊은 증오에 차 있기 때문에 사랑이 들어올 틈이 없다.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일반적인 피해의식의 마음 상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싸워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 응어리진 증오가 충분히 해소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이는 피해자였던 이들은 모두 광기 어린 덴마크 군인이나 시오니스트가 되어도 좋다는 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피해자의 싸움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피해자의 상처는 가해자가 되는 것으로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내는 일일 뿐이다. 

    



진짜 가해자와 싸워라!  

   

 피해의식에 휩싸인 피해자들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 싸움은 진짜 가해자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덴마크인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독일군 혹은 독일 소년병인가? 시오니스트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팔레스타인인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엉뚱한 적, 자신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허구의 적일뿐이다. 그들은 모두 진짜 가해자가 아니다. 진짜 가해자는 ‘전쟁 그 자체(국가주의)’다. 덴마크인들과 시오니스트들은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 시대의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의 피해자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돈 많은 이들과 싸우거나 돈을 더 벌려고 싸워야 하는가? 성역할의 피해자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남자 혹은 여자와 싸워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엉뚱한 적들과 싸우다 보면 피해의식이 치유되기는커녕 자신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테다. 자본의 피해자들은 ‘자본 그 자체(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 성역할의 피해자들은 ‘성역할 그 자체(구분 짓기)’와 싸워야 한다. 그것들이 진정한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싸움은 같다. 사랑하거나 싸워보면 이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사랑하면 싸우게 되고, 싸우면 사랑하게 된다. ‘칼 상사’는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어서 조국의 허락도 없이 아이들을 고향인 독일로 돌려 보내준다. 이제 ‘칼 상사’는 자신의 조국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전쟁 그 자체(국가주의)’와의 싸움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랑하면 싸우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칼 상사'처럼 사랑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랑할 수 없다면, 진짜 적들과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을 이어갈 때, 비로소 한 사람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와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은 사랑하게 된다. 나처럼 자본에 상처받았던 한 사람을 볼 수 있고, 끝내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구분 짓기와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은 사랑하게 된다. 나처럼 (성역할이라는) 구분 짓기에 상처받았던 한 사람을 볼 수 있고, 끝내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진짜 적과 싸워나갈 때 우리는 끝내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라. 그럴 수 없다면 싸워라. 진짜 가해자와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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