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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

피해의식 너머의 아름다운 삶


 피해의식을 넘은 이들을 만난 적이 있는가? 피해의식을 극복한 이들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일은 매우 귀하고 드물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 일은 불가능해” 우리는 때로 너무 쉽게 어떤 일의 불가능성을 말하곤 한다. 이는 그 일을 이뤄냈던 이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가능성’은 ‘가능성’의 발견 부재일뿐이다. 달리 말해,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은 ‘불가능성’은 사라진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 우리 역시 희망을 얻을 수 있다.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을 넘은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때 우리의 피해의식을 넘어설 하나의 가능성이 더 마련될지도 모른다. 피해의식을 넘은 이들의 삶을 잠시 엿보자.      



불가능성의 가능성


 TV를 켰을 때눈앞에 펼쳐진 참사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혹하더군요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라고 하니 이 불쌍한 생명들을 어찌하나 싶었습니다내가 일본에 저렇게 피해가 커서 어떻게 하냐?”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일본 생각만 해도 밉지 않으냐고요사실 일본이 밉기로 치면 나만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13세 때 위안부로 끌려가 6년 동안 악몽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죽은 것만도 못한 날들이었죠죽으려고 약을 먹어도 사람 명이 억지로는 안 되는지 죽어지지 않습디다. (중략우릴 이렇게 만든 일본 정부는 70년 동안 사과 한마디 없어요우리를 이렇게 못 살게 만들었으니 일본도 폭삭 가라앉아버려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일본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TV에서 너무 참혹하고 슬픈 광경을 보니까 내가 당한 건 잠시 잊어버렸어요아이구아이구저걸 어떡하나몸과 마음이 성한 데가 없지만 마을 전체가 떠내려가고 발전소가 폭발한다는데내가 아프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어요세상에 그런 무서운 난리가 어디 있겠어요옛날 우리네들이 당할 때는 이보다 더 큰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더 무서운 일도 생기네요사람이라면 그런 참사를 보고 다 같은 마음일 겁니다.


 우리는 1992년부터 20년째 매주 수요일이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합니다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배상하라고요이번 주만은 구호를 외치지 않으려고 합니다국가적 재난을 겪고 있는 일본 정부에 당장 뭔가를 요구하는 건 사람으로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중략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도 아는 법이잖아요그래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고통에 빠져 있는지 가슴으로 느껴집니다그 사람들이 단 한 명이라도 덜 다치고더 빨리 쾌유하기를 빕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어요지금은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죠. (중략이 무시무시한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일본인들에게 힘내라는 격려를 하고 싶어요


경향신문』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 일본 참사’ 소회     



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


 길원옥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이다. 그녀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는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일본에 의해 참혹한 일들을 온몸으로 겪어내었다. 하지만 그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인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자신의 고통은 잠시 잊고 일본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심지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일본을 돕고 싶다고 전했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 너머의 삶이다. 이는 얼마나 귀하며 드문 삶인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귀하며 드문 법이다. 내게 그녀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다.      


 길원옥 할머니는 어떻게 피해의식을 벗어났을까? 길원옥 할머니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 크고 깊은 상처가 그리 쉬이 아물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피해의식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혜롭기 때문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나’의 상처를 돌보며, ‘너’의 상처마저 돌보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의 상처를 모두 치유하는 일이다. 그것이 지혜다. 만약 길원옥 할머니가 지혜롭지 않았다면, ‘나’의 상처에만 매여 일본의 참사에 은근히 통쾌해하거나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흔한 이들처럼 말이다.      

 

 그녀는 지혜롭다. 이것이 그녀가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대로 치유해가고, ‘너’의 고통에 대해서는 함께 아파해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일본 정부에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한다. 이는 ‘나’의 고통은 그것대로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너’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너’를 배려한다. 심지어 그 ‘너’가 ‘나’의 고통에 깊게 관계된 ‘너(일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 모두 고통을 치유해주고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가 또 있을까? 


     

철학적인, 너무나 철학적인

     

 철학은 지혜로워지는 학문이다. 그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지혜로운 철학자들을 많이 만났다. 철학이 지혜의 학문인 이유는, 철학이 성찰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성찰은 언제나 부끄러움으로 온다. 한 명의 철학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부끄러웠고, 그 부끄러웠던 만큼 내 삶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철학을 통해 지혜로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철학을 통해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   

  

 길원옥 할머니는 내가 만난 철학자들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지혜로웠다. 그녀는 철학적인, 너무나 철학적인 사람이었다. 길원옥은 할머니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한없이 부끄러웠다. 갖가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긴 시간을 보냈던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았다.  

    

 나에게는 많은 피해의식이 있었다. 상처받아서 생긴 피해의식도, 상처받지 않았지만 생긴  피해의식도 있었다. 그 모든 피해의식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상처받지 않았는데 생긴 피해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상처를 받아서 생긴 피해의식이라 한들, 그 상처가 길원옥의 할머니의 그것과 비할 바 되겠는가? 그녀는 일본에 의해 그 참혹한 상처를 겪고도 일본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나를 부끄럽게 했고, 그 부끄러움 덕분에 그 지독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삶은 소중하다.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 역시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네 삶을 본다. 우리는 가난, 외모, 젠더, 학벌, 명예 등등에 의해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가? 그 피해의식으로 ‘나’와 ‘너’와 ‘우리’를 얼마나 괴롭혔던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녀의 아름다움 앞에서 한 없이 부끄러워질 일이다. 그 부끄러움으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일이다.     

  

 피해의식 너머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길은 있다. 아름다움 앞에서 부끄러워하면 된다. 피해의식은 분명히 넘어설 수 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더 지혜로워져서 더 아름다워지려고 애를 쓰면 된다. 그 지난한 여정 끝에 우리 역시 길원옥 할머니처럼 우리 역시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아픔은 그것대로 치유하고, 타인의 아픔은 또 그것대로 함께 아파해주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우리 역시 피해의식 너머의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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