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싫었다. “선배랑 밥을 먹는데 뿜빠이를 한다고?” 안 주고 안 받는, 아니 다들 자기 것만 챙기는 이들뿐이었다. “앞에서 웃다가 갑자기 저런다고?”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하고 뒤에서는 험담과 쌍욕을 하는 이들뿐이었다. 없어도 가오로 살아온, 앞에서 못 하는 말은 뒤에서도 안 하고 살아온 내게 ‘스울깍쟁들’은 참 안 맞았다.
1998년 새벽, 서울역에 내렸다. 항상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합격을 해도 등록할 수 없을 대학교에 원서를 쓰러 왔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던 그 추위가 '부산 촌놈'을 설레게 했다. 여기가 서울이구나. IMF와 상관없이 늘 돈이 없었던 우리 집이었기에, 서울의 꿈은 접고 장학금을 준다는 부산의 어느 공립대학교에 들어갔다. 20년은 마산에서, 10년 부산에서 살았다.
서울로 갈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길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며 내게 남겨진 선택지는 거제도와 창원이었다. 항상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섬’이 아닌 ‘뭍’이었다. 그렇게 창원 공단에서 공돌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독히 보수적인 선배 엔지니어들이 그렇게 싫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동아줄이 될 줄 몰랐다. “너 나랑 서울 갈래?” 서울에 새로운 팀을 만드는 데, 보수적인 선배들은 근무지를 서울로 옮기는 것을 다들 거부했다. 결국 막내인 나의 차례까지 온 거였다.
2008년 새벽, 강남역에 내렸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들이 어디론가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항상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다던 '부산 촌놈'의 바람이 드디어 이뤄졌다. 1998년 겨울의 설렘이 씁쓸했다면, 2008년 겨울의 설렘은 나의 심장을 뛰게 했다. 나의 심장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서울역에서 강남으로 오는 데는 10년이 걸렸지만, 강남에서 상해로, 첸나이로, 프랑크푸르트로, 밀라노로, 시애틀로, 뉴욕으로 가는 데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원 없이 더 큰 세계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스울깍쟁이’가 되지 못했다.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인 직장을 그만두었다. ‘스울깍쟁이’, ‘프랑크푸르트깍쟁이’, ‘밀라노깍쟁이’, ‘시애틀깍쟁이’, ‘뉴어커깍쟁이’까지 만나고서야 알았다. ‘깍쟁이’는 내게 안 맞는 옷이라는 걸. 나는 결국 없어도 가오로 살아야 하는 ‘부산 촌놈’이었고, 사람들을 대할 때 앞뒤가 다른 것은 질색인 “부산 촌놈”이었다. 태생이 “부산 촌놈”이었지만, 서울에 남기로 했다. “부산 촌놈”에겐 후진기어가 없으니까.
2015년 새벽, 홍대역에 내렸다. 어느 카페 구석 자리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철학흥신소’라는 간판 없는 인문공동체를 열었다. 첫 수업에서 수업료 2만 원을 받고, 밥값으로 6만 원을 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나 정말 잘 살고 있구나. 서울에서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구나.” 내 생계가 팍팍해질 수록 내 마음은 더 풍성해졌다. 그렇게 ‘철학흥신소’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어떤 이는 결혼을 했고, 어떤 이는 아이를 낳았다.
세월이 지나 한 번씩 편지를 받는다. “철학흥신소를 만나 행복했다”고, “서울도 조금은 살만한 곳이라 느낀다”고. 그들에게 차갑고 건조한 서울이 아닌, 따뜻하고 사람냄새 나는 작은 공간을 선물해 주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조금은 이뤄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언젠가 내가 나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서울 정착기는 나름 성공적이었나보다.
나의 정착기는 이제 시작이다. 더 큰 곳에서 다시 또 새롭게 정착하는 모험을 멈추지 않을 테다. 더 척박하고 더 차가운 땅을, 더 따뜻하고 더 사람냄새 나는 공간으로 영토화하는 모험을 이어나갈 테다. 지금 내 곁에는 더 큰 곳에서 정착할 힘을 보태줄, 후진 기어를 뽑아버린 “부산 촌년” “부산 촌놈”들이 있으니까. 나의 정착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