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만약 매일 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늘 꾸준하게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 게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확히 아침 7시에 일어나 욕실로 가서 물을 한잔 받은 후 변기 속에 붓는 일이라도 매일 계속한다면 말이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희생> 중
15년 넘게 의식을 치르듯이 변기에 물을 붓고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시대에 철학자로 살아가고,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저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하지만 미련하게도 타르콥스키의 말을 믿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매일 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앞으로도 변기에 물을 붓는 일을 반복하려 합니다. 세상이 변하게 될지 아닐지 알 수없지만, 타르콥스키의 말을 믿어보려합니다.
타르콥스키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많이 좋아했던 스피노자에 관해 썼습니다. 서른 아홉에 썼던 글을, 마흔 다섯에 다시 고쳐 썼습니다. 그 사이에 생긴 제 얼굴의 주름만큼 저의 철학과 저의 글 역시 원숙해졌기를 바랍니다.
이하 개정판 머릿말
‘자연스러운 삶’을 위하여
1.
마흔다섯.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식사를 하고, 잡니다.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합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습니다. 가급적 너무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은 먹지 않습니다. 쇼핑을 하지 않습니다. 담배를 피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커피를 줄여가고 있습니다.
“무슨 낙으로 사세요?” 제 삶을 아는 사람들은 의아한 듯 물어보곤 합니다. 그네들이 보기에 제 삶은 마치 수행승처럼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저를 걱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참고 살다가 나중에 더 크게 터져요” 저는 금욕적인 수행승처럼 살고 있는 걸까요? 그래서 눌러진 욕망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저를 수행승처럼 보는 시선 앞에서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진정한 수행승에 비해, 제 삶은 여전히 온갖 세속적 욕망에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억압된 욕망을 걱정하는 시선 앞에서는 약간의 웃음도 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욕망을 억압하기보다 오히려 제게 주어진 ‘낙’을 충실히 따르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스물아홉. 직장인이었던 시절, 기름진 음식이든 자극적인 음식이든 뭐든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만큼 먹었습니다. 또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진탕 마셨습니다. 꽤 돈을 잘 벌던 그 시절, 퇴근 후에 백화점을 들락거리며 쇼핑을 했습니다. 주말이면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낙’을 한껏 누리며 살았습니다. 조금 더 큰 ‘낙’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서른넷. 직장을 그만두고 철학을 공부하는 글쟁이가 되었습니다. 자유로워졌습니다. 밤술 대신 낮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꼴 보기 싫은 인간들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직장을 다니지 않기에 정해진 시간에 잘 필요도 없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날 필요도 없었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식사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공부하고 글을 썼습니다.
사실 저는 긴 시간 금욕주의적 수행승보다는 쾌락주의적 자유인에 가깝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행복해졌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직장인 시절에도, 작가로 살았던 시절에도 기묘한 불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삶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것 같은 불안에 시달려야 했고, 자유인이라고 믿었던 시절에는 내 삶이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것 같은 무의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2.
마흔 즈음. 스피노자를 공부하며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한 해설서를 썼습니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며 진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제가 욕망을 따르는 방식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이. 욕망을 따르는 것은 분명 기쁨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에는 세 가지 층위가 존재합니다. 자극적인 기쁨과 반발적인 기쁨, 그리고 자연스러운 기쁨.
자극적인 기쁨은 무엇일까요? 이는 가장 아래 층위의 기쁨으로,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을 잔뜩 먹고, 술에 취하고, 쇼핑을 할 때 느껴지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제가 직장을 다닐 때 빠져 있던 기쁨이었을 테죠. 이 자극적인 기쁨의 단계를 지나면, 반발적인 기쁨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억압된 욕망들이 있죠. 그 억압된 욕망을 해소하면서 느끼게 되는 기쁨이 바로 반발적인 기쁨입니다. 자신을 옥죄던 이러저러한 규칙이나 규범을 벗어날 때 느껴지는 기쁨이죠. 이는 제가 직장을 벗어나 작가로서 살아가며 느꼈던 기쁨이었을 겁니다.
이 두 층위의 기쁨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자극적인 기쁨을 따르면 끝내는 삶이 부서지는 슬픔(불안)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술이 깬 아침이면, 쇼핑을 끝내고 백화점을 나올 때면, 기묘한 불안에 시달렸던 것처럼 말이죠. 그다음 기쁨의 단계에 이르러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반발적인 기쁨의 끝에는 삶이 희미해지는 슬픔(무의미)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회사를 그만두고 제 멋대로 살았을 때, 기쁨은 잠시였고 이내 나 자신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은 무의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자연스러운 기쁨입니다. 이는 뭐랄까? 햇살 좋은 바닷가에서 몸을 누이고 있을 때의 기쁨일 수도 있고, 고즈넉한 산속에서 산책할 때의 기쁨일 수도 있고, 일요일 오후 사랑하는 이와 함께 뒹굴거릴 때 기쁨일 수도 있을 겁니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딱히 특별한 순간도 아니지만, 그 어떤 자극적이고 특별한 기쁨보다 깊은 기쁨의 순간들이 있죠. 은은하고 고요하지만 깊은 기쁨을 느끼는 그 모든 순간이 자연스러운 기쁨일 겁니다.
자연스러운 기쁨에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요? 자연스러운 삶을 살 때일 겁니다. ‘자연’은 무엇일까요? 세계의 본성대로 이어지는 양상이죠.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어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면 눈이 내리죠. 이처럼 원래 그러한 세계의 본성이 펼쳐지는 모습이 ‘자연’이죠. 자연스러운 삶 역시 이와 마찬가지죠. 세계가 자신의 본성을 펼치는 양상이 ‘자연’이듯, 각자가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자연스러운 삶’인 것이죠.
3.
자연스러운 삶에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요? 흔히 ‘자연’스러운 삶은 ‘본능’적인 삶과 헛갈리곤 하죠. 쉽게 말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본능’적인 삶을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여기곤 하죠. 그도 그럴 것이 ‘본능’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아닌가요? 그러니 ‘본능’대로 살면 ‘자연’스러운 삶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오해가 생길 법도 하죠.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본능’(동물)대로 사는 이들을 살펴봐요. 그들 중 은은하고 고요한 깊은 기쁨에 이른 이들이 있던가요? 아마 단 한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본능’대로 살아가려는 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란 자극적인 기쁨이거나 반발적인 기쁨뿐이기 때문이죠. ‘본능’으로는 ‘자연’스러운 삶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 ‘본능’적인 삶은 ‘자연스러운 삶’이 되지 못하는 걸까요? 인간이 만든 ‘문명’이 인간의 ‘본능’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 안의 그 어떤 존재보다 부자연스러운 존재입니다. 모든 인간은 ‘문명’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이죠. 인간 이외의 ‘자연’을 생각해 봐요. 파도는 단 한 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때가 되었는데 피지 않는 꽃은 없습니다. 늦잠을 자는 새는 없습니다. 맵고 짜고 달고 기름진 음식에 중독된 늑대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대상을 미워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이처럼 ‘자연’ 안의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본능(본성) 대로 흘러가는 것 자체로 자연스럽죠.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요? 매일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고, 때가 되었는데도 행동하지 않으려 하고, 늦잠을 자고 싶어 하고, 맵고 짜고 달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은 이를 미워하기도 하죠. 이런 일들 역시 모두 ‘본능’적인 반응이죠. 그런데 이 ‘본능’은 자연스러운 본능(본성)이라기보다 ‘문명’에 의해 교란된 본능일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삶으로는 결코 ‘자연’스러운 삶에 이를 수 없는 이유죠.
인간은 ‘문명’을 이룩한 죄로, 자연스러운 삶에 이르기 위해 두 가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성찰’과 ‘수행’입니다. 자연스러운 삶을 바란다면, ‘성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문명’에 의해 왜곡된 ‘본능’인 것은 아닌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자연’적 욕망(본성)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문명’에 의해 왜곡된 ‘본능’적 욕망을 ‘본성’적 욕망으로 회복하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 ‘성찰’과 ‘수행’을 통해, 비로소 자연스러운 삶으로 전환이 가능합니다. 이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것을 원하게 된 삶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원하게 되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그 전환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러운 기쁨이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저 역시 그러한 전환의 과정을 지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왜곡된 욕망(술·담배·쇼핑·무규칙한 삶)을 욕망하는 삶에서 진정한 욕망(글쓰기·철학·운동·규칙적 삶)을 욕망하는 삶으로 지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금욕주의적 수행승이 아니라 쾌락주의자에 더 가까울 겁니다. ‘자연스러운 삶’이 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는 쾌락주의자 말이죠. 저는 지금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쇼핑하는 것보다 매일 글 쓰고 책 읽고 운동하는 것이 더 큰 기쁨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런 규칙도 없이 사는 것보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식사하고 자는 것이 더 큰 기쁨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욕망을 따르는 기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요량입니다. 만약 과거의 자극적이고 반발적인 기쁨이 지금 ‘자연스러운 삶’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준다면 저는 기꺼이 과거의 기쁨으로 돌아갈 겁니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기쁘게 살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아마 그런 일을 없을 겁니다. 스피노자를 만나서 ‘자연스러운 삶’이 어떤 것인지, 그런 삶을 살아내려는 과정이 얼마나 큰 기쁨을 선물해 주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자극적인 기쁨에 지쳤나요? 반발적인 기쁨에 공허함을 느끼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역시 스피노자를 만날 시간입니다. 여러분께 닿은 이 글이,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회복할 수 있는 각자만의 ‘성찰’과 ‘수행’을 촉발하게 되길 바랍니다. 각자의 왜곡된 욕망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욕망에 다가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삶의 불안과 무의미 넘어 ‘자연스러운 삶’에 이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이 유리병 편지가 닿은 이들과 언젠가 은은하고 고요하며 깊은 기쁨이 그득한 행복의 세계에서 만나게 되길 소망합니다.
2025. 8. 17
서른아홉에 썼던 원고를 마흔다섯에 다시 고쳐 쓰며
‘자연스러운 삶’의 초입에서
황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