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보다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것도 없다.
이별보다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것도 없다.
‘타잔’식 연애는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해롭다. 가급적 빨리 벗어나야 할 연애 방식이다. 어떻게? 어른이 되면 된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엄마로부터 독립을 하지 않던가.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이는 혼자 있을 수 있을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점 어른이 된다. 마찬가지다. ‘타잔’식의 연애는 이별 뒤에 한 동안 그 이별을 온전히 감당해보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사랑이 끝났다면, 한동안 이별을 온전히 감당하며 혼자 버텨보는 것. 그것이 ‘타잔’식 연애를 끝내고 성숙한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별은 아프지만 때로 유익하다. 이별만큼 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약도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는 것이 잘 안 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가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생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농담처럼 놀리곤 했다. ‘넌 아마 사이코 패스일거야’ 그는 나의 짓궂은 장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지도, 소설을 읽으며 감동을 받지도, 타인들의 아픔도 잘 읽어내지도 못했다.
사이코 패스의 이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에게 늦은 밤 연락이 왔다. 술 한 잔을 하자는 거였다.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소주 몇 잔을 연거푸 들이키고는 말했다. “여자 친구랑 며칠 전에 헤어졌어. 그런데 너무 힘드네.” 나를 더 당황시켰던 건, 언제나 냉정할 정도로 이성적인 그 친구의 눈물이었다. 아이처럼 터져 나왔던 눈물. 그 아픔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아무 말 없이 그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그리곤 말해주었다. “다 지나갈 거야”
그 친구는 한 동안 혼자였다. 이별을 혼자 감당했다. 그 이별의 아픔이 잦아들 때 즈음 그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그는 변했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음악을 듣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소설을 읽고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건, 가방에 노란색 세월호 리본을 달았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찾아온 놀라운 변화들, 그 변화들은 분명 성숙이었다. 그에게 이별이라는 아픈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 내게 사이코 패스라고 놀림 받으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이별을 감당해 본 사람은 안다. 자신이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이별 뒤에 혼자 있어 보면 알게 된다. 그 이별의 아픔이 점점 옅어갈 때 즈음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걸.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보인다는 말은 성숙한 사람이 되어있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별은 아프다. 하지만 괜찮다. 이별만큼 유익한 일도 없다. 세상 어떤 수업과 책도 주지 못했던 ‘성숙’이란 선물을 이별이 주고 떠나니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건, 때로 다행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