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겠군. 왜 이리 괴물이 되어 버렸는지도...
난 정말 저 인간이 내가 사라진게 슬퍼 저러는건줄 알았어.
후후. 아주 엄청난 착각을 했었군.
그래도 말야... 자기애와 삶에 대한 애착이 참 엄청난거 같아.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도 않어. 오기랑 독기 빼면 허깨비여. 가장 소중한 걸 일찍 잃고 그 후론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인생을 사는 남정네지. 그런데도 본인은 아직도 모르고 있지. 성공에 집착하는 남자들은 알고보면 사는 이유가 없어 그렇게라도 옭아매야 살 수 있는걸지도 모르지...어떤 인간들은 오장육부는 있는데 이 뜨거운 가심, 심보라는게 없는 인간들이 있어. 그런 것들은 살아도 사는 줄 모르고 ...
뭐땀시 이승에서의 애비는 쫓아샀소. 죽으면 이미 인연도 끝난것인디. 뭐 좋은 애비는 아니었더라도 해꼬지해야 할 만큼 원망이 남은것도 아니잖어? ”
“.... 알고 싶은게 있어요. 저 남자는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있었던거에요? 대체 아저씨한테 돈을 주고 우리 엄마를 죽이라고 한건 누구에요? 그리고... 조 현경도 임신을 핑계로 저 인간과 결혼한거라면 그 아이는 어찌된거요? 죽었어요?”
“.... 나도 잘 모르제... 난 저 남자는 처음 봐. 내한테 돈을 주고 시킨 인간은 말라비틀어진 젊은 여자였어. 끽해야 한 스물 넷 되었을라나 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것이 아주 무서웠어. 산 인간이 그렇게 무서운 분위기인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아직도 생생혀네. 자금자금한 목소리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바다에 처넣어요.’ 라고 하는데..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 근데 그여자가 그 자리에서 작은 보따리를 툭허니 던졌는데... 여니까 몽땅 돈이여 그게... 내가 돈을 보니 눈이 뒤집혀서리.. 아이고.. 아이고… 새끼 한 번 살려보겠다고... 아이고... “
아까부터 포장마차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앉아 이 정구를 지켜보던 한주와 주정뱅이 영은 포장마차 주인이 퇴근하면서 한쪽켠에 말아놓은 천막위로 자리를 옮겼다.
“또 또 신파떨고 있네. 그만하세요. 듣기 싫으니까...
그 돈 준 여자... 보여주면 알아볼 수 있겠어요?”
“당연히 알아보지. 이런 건 아이큐랑 상관없어. 귀신 아니래도 그 여자는 알아본다. 그런 희한한 분위기의 여자 흔하지 않아.”
“따라오세요.”
한주는 결심한 듯 일어서 긴 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앞장을 섰다.
“조기... 나는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한 케이스라... 남의 집은 거주민이 초대해 주지 않는 이상은 잘 못 들어가는디... 그 여인네를 어찌 쪼까 밖으로 꼬여내 볼까나?”
“시끄러워요.
나 따라 들어오면 되요. 난 여기 살던 인간이었으니까…”
한주는 손을 내밀어 주정뱅이 영의 손을 잡으려다 찝찝한 듯 그의 옷깃을 살짝 잡고 끌었다.
이 정구는 이미 곯아 떨어졌는지 컴컴한 거실 한 켠에 놓인 테이블 앞에는 두통이 있는 듯 머리를 감싸 쥔 조 현경이 와인잔을 앞에 두고 있었다.
“헉!!
저 여자야!! 저 여자 맞아! 고대로네... 늙지도 않았어.
부자들은 늙지도 않는구만? ... 하여간 저 여자야. 나한테 돈 보따리를 던진 여자…”
“역시.. 그랬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럼 저 여자가 가졌다던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거지? 그 아이가 죽게 되어 그런 일을 벌인건가…”
“차차 알게 되겄지. 오늘 이 정도만 알아낸 것도 정말 놀라우이. 역시 대가리가 좋은 것들은 아주 일처리가 놀랍구만.”
“대가리는 짐승한테 쓰는 말이고... 인간한테는 머리라고 하는거에요.”
“... 이보게... 학생 귀신... 귀신은 인간이 아니랑께. 짐승이라고 봐야제. 근까 대가리가…”
한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정뱅이 영은 금방 한주를 따라가기 전 잠시 현경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다.
“독한 여편네... 인간을 둘이나 죽이고 잘도 살아 있네. 줄건 없고 감기라도.. 후~~”
주정뱅이 영이 독한 입김을 붓고 떠나자 갑작스레 기침을 해대던 현경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 아니 대체 어디에 뭐가 있다는거야!! 지각하게 생겼구만...”
“ 연습장 구석구석도 보고, 가방 깔판 밑도 좀 뒤져봐... 없어? 흠... 그럼... “
“아! 찾았다!! 이거냐? 경제 책 128페이지 꼭 너 같이 생긴 인물 위에다가 붙여놨네. 이거 이제 어떡해?”
“빨리 뒷문 뒤 소각장쪽 가서 태워! 그래야 내가 네 근처로 갈 수 있어.”
“호.. 그래? 안 태우고 갖고 있으면? 그럼 너 나 귀찮게 못하겠네?”
“... 그런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 윤조... 내가 끔찍하게 싫을 때면 그저 한 마디만 하면 돼. ‘잘 가’ 라고…”
“뭐냐? 그 우울한 목소리는? 아주 그냥... 야 근데 소각장 갈라면 담 넘어야 하는데... “
“가방을 먼저 담 너머로 던져. 일단 부적이랑 너랑 분리되면 내가 너 안으로 들여보내줄께.”
“오오!! 너 그런거 할 줄 알아 이제? 귀신 급이 좀 올랐나? 기대된다야.”
“시끄러. 얼른 해. 너 정문 앞 단속 끝나면 학주랑 선도들이 한바퀴 도는거 몰라?”
“아.. 맞다…”
마지막 카운트 다운 소리가 교문쪽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선도부장이 학생주임이 막대기로 교문을 치는 것에 맞추어 우렁차게 구령을 붙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비공식 세계 기록 소유자라 할만한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세렝게피티를 가로지르는 얼룩말처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 가방을 쏟아 놓고 앉아 있던 윤조는 얼른 챙겨서 그들을 피해 뒷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 윤조야! 너 어디가!! “
“제발 모른척하고 빨리 뛰어!!!”
추운날씨에도 이미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뛰어오느라 땀에 젖은 정수가 대열을 이탈하는 윤조를 발견했다. 윤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뒷문쪽으로 통하는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에 접어들자마자 윤조는 흠칫 놀라 뒷걸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뒷담을 넘어본 적이 없었던 윤조는 몰랐지만 으례 아침 등교시간엔 선도부원들이 뒷문도 지키고 서 있다. 복장이 불량한 아이들이 몰래 담을 넘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제기랄... 저쪽으로 못 가면... 소각장쪽은 담 넘기 애매한데…”
“걱정말고 일단 가... 일단 가방을 안에 던지면 돼. “
“...야 근데...어차피 나한테 말은 멀쩡하게 하잖아. 굳이 네 그 흉한 몰골을 나한테 보여야 하는 이유는?”
“거 참 말 많네. 지금 너한테 이렇게 말 거는것도 정말 머리가 빠개지게 아프거든? 그 돋보기 꼬마 무당이 되지도 않게 갈겨 써서 뭐 그다지 효과가 있진 않지만 머리는 깨지게 아프다구!”
“아.. 아프구나... 귀신도 아픈게 있나? 어쨌건... 가방은 던졌고…”
“이건 신체적으로 아픈게 아니라고. 머리에 나는 생리통같은거라고나 할까?”
“네가 생리통이 뭔지나 아냐? 되지도 않는 소리하고 있어. 어쨌건 이제 어떡해? 내가 치마 입고 지금 이 돌담을 타야되냐?어어... 야!! 으악!!! 헉!!”
윤조는 어느 새 담 안 쪽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석수를 끌어 안고 서 있다.
“헉! 뭐야... 너 왜 여깄어!”
윤조는 당황해서 얼른 석수에게서 떨어지며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너야 말로 뭐냐? 너 저기 담장위에 서서 그대로 떨어졌잖아. 나를 향해서... 너 너무 나 믿는거 아니냐? “
“그게.. 그래?? 내가 저기 위에 서 있었어? 그게 약간 뭐랄까 바이킹 탈 때 한 세 번 제일 꼭대기 까지 올라가는거 있잖아... 그런거 같앴는데... 내가 저기 서 있었다구? ”
“얘가 아침에 뭔일을 당했나... 왜이리 헛소리야. 기억이 안나냐? 어떻게 돌담을 겨우 넘는것도 진짜 힘든데 그 위에 서 있을수가 있냐? 너 알고보면 뭐 무술도 하냐?... 그나저나 그다지 늦은 것도 아닌데 그냥 떳떳하게 정문으로 들어오지 ... 뭐하러... 옷도 다 멀쩡하게 입었고... 교복도 안 줄였고.. 명찰 오케이... 뭐냐 너? 가방에 이상한거 있어?”
“아냐 그런거... 내가 뭐 좀 태울게 있어서... 너 좀 저리 가 줄래?”
“태울거 있음 나한테 줘. 나 이번 주는 소각장 당번이야.”
“이번엔 또 뭐 잘못했냐? 네가 힘들다는건 알지만... 공부해. 늦기전에... 꼭 뭐가 되기 위해 하는게 공부는 아니잖아.”
“뭐냐? 공부가 제일 쉽다 이 얘기 할라고? 나도 그건 동의한다. 공부가 제일 쉽다는건... 태울거 있음 저기 통 안에 그냥 집어 넣어. 지금 태우는 중이니까…”
“아 그래? 알았어.”
윤조가 경제책에 껴져 있는 부적을 접어 쥐고 소각장쪽으로 향하려는데 석수가 다시 윤조의 팔목을 잡았다.
“아무래도 내가 해줄께. 지금 한참 타는중에다가 바람도 불어서 별로 안 좋아. 내가 더 키 크니까 내가 해.”
“…응?”
“야! 걔가 태우면 안돼. 너한테 붙인 부적이니까 네가 태워야 해! 부적 주지 마! 걔한테도 안 좋아!!”
한주의 다급한 외침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석수를 세게 밀쳐냈다.
“그냥 내가 할께…”
거친 윤조의 반응에 석수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머쓱한듯 물러섰다.
“난 그냥 도와줄려고... 머리 조심하구...
쯧.. 내가 그렇게 도와준다 했구만…”
소각장에 부적을 넣고 타는 것을 지켜본후 사다리를 내려오는 윤조를 보더니 석수가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라구?”
“아냐... 교실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 들러야 할것 같다야.”
석수는 놓았던 긴 막대기를 들고 소각장을 살피러 갔다.
“야 나와봐. 이제 나올수 있냐?”
“화장실 꼭 들러라…”
파리하게 마른 한주가 팔짱을 낀 채 윤조 옆을 걸으며 말했다.
“아우... 뭐야... 나 머리 탔어?”
그제사 윤조는 손으로 황급히 머리카락을 쓸어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응... 눈썹도... 괜찮아 넌 아직 살아 있으니까 털들은 금방 자랄거야.”
“죽을래 진짜?”
“...참 너는 웃긴거 같애…”
한주는 화가 잔뜩 나서 씩씩대는 윤조를 복도에 두고 사라져버렸다.
“귀찮은 놈... 눈썹이 이게 뭐야... 정말... 미치겠네…”
윤조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확인한 순간 난감했다. 눈썹 반이 타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내가 도와줄라고 부적을 써 줬구만... 그건 왜 태우고 지랄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