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윤조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 한 것을 가까스로 견뎠다.
어느 새 성숙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거울 너머로 윤조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남의 가방은 뒤지고 난린데? 그리고 그런 흉측한 물건을 왜 내 허락도 없이 막 넣어두는거야?”
“말했지... 아주 위험한 놈이라고... 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모르고 있지만 말야... 걔가 죽을 때가 령각에서 말하는 89번째 달이 꺼진 시각이었어. 그 순간에 원령이 된 혼은 아주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말야... 분명히 굉장히 무자비한 놈이어야 하는데 어째서 너같은 혼한테 붙어 있는지 모르겠거든... 그래서 내가 너를 계속 지켜보는거야. 대체 정체가 뭔지…”
“영장류에 속하는 17살 먹은 암컷 생물이다 왜!! 아침부터 쉰소리야…”
“내 말을 허투루 들었다가는 분명히 후회하게 될거야... 똑바로 새겨들어…”
윤조는 일부러 물을 성숙쪽으로 튕기고 나가던 발걸음을 멈춰 성숙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리고... 네 부적... 그거 엉망이라던데?”
앞머리를 최대한 내리고 교실로 들어간 윤조는 왔다는 티를 내려고 가방이며 책들을 자리에 펼쳐두고 아침나절은 반성문 작성으로 소일중인 미나를 보러 갔다.
“그렇게 매일같이 반성문 쓰다간 아주 반성문으로 책 내겠소…”
“왔냐? 얼른 가서 자율학습 안하고 왜 여기는 왔냐…”
미나는 무미건조한 얼굴을 여전히 들지 않은채 뇌까렸다.
“상황 보고하려고... 지금 삼일째 돈 벌어서 반 모았어. 토요일에 크게 한 건하고 끝낼거야. 그러니까... 월요일에 그 꼰대 만나서 돈 주고 발 빼. 알았지?”
“... 너 왜 짜증나게... 잘 해주고 지랄... 헉... 커허허허... 대체 그 눈썹꼬라지는 또 뭐냐? 너 은근 진진한 와중에 개그쟁이다?”
“아.. 소각장에서.. 하여간 그럴 일이 있구... 그런줄 알아라. 돈은 안 갚아도 된다. 나도 그다지 어렵게 번거 아니니까... 보시한다 생각할테니 그런줄 알라고. 대신 담배는 끊는거다.. 물론 나 때문에 이번엔 그런건줄 알고 있지만…”
“약속한다. 깨끗하게 살기로…”
“그래... 토요일에 끝나고 석수가 연락할거다.”
“….야!”
담임이 순찰을 돌기 전 얌전하게 아침 자율학습에 들어가 있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윤조를 미나가 불러세웠다.
“왜!”
“고맙다... 도와줘서... 네가 우리 엄마보다... 더... 든든하다…”
“됐다. 난 너같이 막나가는 딸 싫다. 나중에 보자.”
미나는 윤조가 며칠째 기원에 나가 내기 바둑으로 돈을 모으고 있는 것을 석수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대체.. 걔가 날 왜 도와준다고 생각하냐?”
“네가 우리 안 걸리게 도와줘서 그러는 걸 수도 있고... 아님 정말 너를 친구로 생각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모르지. 그런데 나는 너 그러고 있는거 신경질이 나서 하는 수 없이 돕는거다.”
석수는 퉁명스럽게 받아치고 자리를 떴지만 미나는 언젠가 초등학교때 석수의 자전거를 억지로 뺏어 타다 무릎이 깨졌을 때도 그는 화를 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야이 기집애야. 넌 아직 자갈길에서 탈 실력은 안 된다고 말했지? “
“야! 치사하게... 자전거 약간 긁힌거 가지고…”
“내가 지금 자전거 때문에 그래? 네 무릎이 깨졌잖아! 왜 화나게 만들어!!”
그 때나 지금이나 석수는 그랬다. 말수가 적고 퉁명스러웠지만 누구보다 속마음은 순두부같다.
‘너나 나나... 우린... 왜 이리 벌써 고단한거지?’
지겹고 의미도 없는 반성문을 쓰던 손을 잠깐 놓은 채 미나는 방금 나간 윤조를 생각하다 석수를 함께 떠올렸다…
“너 정말 솔직히 말해서 대호가 막 뚱뚱하고 그 뭐냐 네가 싫어하는 막 수염 덥수룩하고... 그래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냐?”
윤조가 막 교실에 들어설 무렵 승진이 정수와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근데 멸치가 돼지보다 잘 생긴거라곤 누가 그래?”
“야! 하 윤조! 멸치라니!! 우리 오라버니한테!! 그리고 나는 대호 오빠가 골룸같이 생겼어도 좋아한다고! 내 사랑은 진실되다고!!”
아침부터 김에 밥을 싸 부지런히 입에 넣으면서 정수가 진심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거 참!! 그렇게 밥 처먹어가면서 할 얘기가 없냐? 좀 조용히 밥만 먹으면 안돼?”
앞 자리에서 수연이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부릴 차례다.
“공부하자... 또 시험이니까…”
윤조가 책을 고르기 시작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바라보던 승진이 다가왔다.
“너 진짜 계속 이런다... 우리 얘기 좀 해야 하잖아?”
“응? 아... 그때 그 말... 내가 미안해... 그냥 요즘 내가 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그래... 좀 정리되면 얘기할께.. 응? 지금 말해봤자 네가 이해할 수도 없을거야…”
“그래. 그 네가 말하는 좀 지나서가 너무 늦지 않아서이기를 바랄께.”
승진은 쌀쌀맞게 끊어 말한 후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 저런 애들이 제일 좀 성가시달까?
솔직히 말해 봐. 너, 쟤랑 가장 친하다고 말하지만 네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꺼내서 쟤한테 해 봤니? 별로 없을걸? 그게 왜 그런지 알아? 너한테 쟤는 지루한 뱃길중 옆자리 동행 정도거든. 그런데 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그게 문제야. 쟤 머리 속은 너처럼 한 가지 목표로 꽉 차 있지 않기 때문에 친구도 필요하고 집안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을 누군가가 절실한거라구.
그런데 동의하지?
그런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쟤 부모가 곧 이혼을 하게 생겼고, 남동생이랑 떨어져 살게 될지도 모르는 심란한 상황인것을 너한테 말하고 싶어 죽겠는데 사실 너한테 다 털어놓는다고 뭐가 달라져? 인간들은 참 쓸데없는데에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어.”
“... 내 이야기를 많이 안 하는건 사실이지만 ... 그다지 내 머리가 한 가지 목표로 차 있는지도... 어떤 목표? 일류대를 가야 한다는거? 그것도 과마저 시시해선 안 된다는거? 부모 목에 힘 좀 실어줄 수 있게 똑똑한 딸로 성공해야 한다는거? 그런거 말고 내가 정해 놓은 목표는 있긴 한건지…
그리고 지루한 뱃길에 내 옆에 앉은 그 동행이란 자가 내 벗일수도 있잖아. 내 이야기를 다 해야만 친구인건 아냐. 이유도 없이 마음이 쓰이는 그 사람들을 나는 친구라고 부른다... 그래서 너도 내 친구인지도 모르지…”
아까부터 엎드려 자고 있는 지민의 등에 걸터 앉은 채 냉소적으로 읊어대는 한주를 윤조는 지그시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는 듣고 있다. 원래도 표정이 없었던 한주는 더 굳은 표정으로 가끔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것이 다였다. 지금도 한주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윤조를 마주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것처럼 보이던 승진의 가족이 망가질 위험이란 놀라운 소식을 들었지만 놀랍지 않다. 요 근래 윤조에게 나타난 한주 이후 윤조는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절대 답 나올 리 없는 본질에 사로잡혀 다른 것들에 신경이 쓰이질 않았었다. 한주는 ‘친구’라는 이름의 부질없는 관계에 대해 신랄했지만 윤조는 승진을 신경쓰지 않을 순 없었다.
“원래 모든 관계에 있어 고르게 편평한 건 없는거야. 한 쪽으로 기울수도 있고 또 한 쪽이 더 다른 쪽을 필요로 할 수 도 있겠지만... 중요한건... 항상 한쪽으로만 기울진 않는다는거야. 그게 바뀌는 순간들도 있는거고... 넌 아마 관계에 대해 마음을 닫은 채 죽은거라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어. “
한주는 별 말이 없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뚫어져라 윤조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꽤 힘들텐데... 아는 체도 할 수 없고... “
윤조는 오전 내내 한주에게서 들은 승진의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 야자 없는 날이잖아. 저녁에 마치고 같이 만두 먹을래? “
내내 서먹했던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은 언제나 뒷 머리가 쭈뼛 설 만큼 어색하고 낯설게 마련이다.
“이 기집애들! 만두를 먹으러 가면서 나한테 말하지 않다니!! 이런 곤장 백대씩 때릴 것들!!”
모골이 송연한 어색함을 잘라준 것은 정수였다. 승진도 정수의 너스레에 어색하게 입 끝을 실룩거린다.
“ 어머... 이 아줌마는 왜 오늘같은 날 문을 닫고 난리래.”
셋은 학교 뒤 고개길에 있는 분식집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학교 안전정비덕에 하루 야자를 면제받은 아이들이 벌써 분식집마다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냥 즉떡이나 먹으러 갈까?”
아까부터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는 정수는 못 참겠다는 듯 다른 분식집을 기웃대고 있다.
“너네 수연이랑 같은 반 학생들이지?
다른 집에 가면 아줌마가 섭섭하다.”
수연의 엄마가 하는 분식집도 근처에 있었지만 친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존심 센 수연이 마주치면 패악을 떨까봐 일부러 피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바깥에 내 놓은 찜통에서 만두를 꺼내러 나온 수연의 엄마가 이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불러세웠다.
“뭐 먹고 싶니들? 오늘은 아줌마가 쏠께. 마음껏들 먹어.”
“아뇨... 저희 돈 있어요.”
피로한기색의 창백한 수연의 엄마는 마른 손마디를 파르르 떨며 앞접시를 가져다 놓았다.
“뭐하러 공짜로 줘? 쟤네 다 부자집 딸들이야. 돈 제대로 받고 팔아.”
아이들이 종소리가 나자마자 뛰어나가고 나서도 한참 남아 수학문제를 마저 풀던 수연이 뒤늦게 나타났다. 분식집 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공부할 단어장을 손에 쥐고…
“저기.. 미안... 네가 곤란하면 우리 갈께.”
“아니 곤란하긴 뭐가 곤란해! 앉아요 학생. 쟤가 성격이 지랄맞아서 그래. 뭘로 먹을래?”
승진이 어색한 상황을 못 참고 일어서려 하자 수연의 엄마가 급히 말렸다.
“다른데도 지금 꽉 차서 기다려야 돼.
그냥 여기서 먹자. 우리도 손님인데 뭐.”
“그럼, 당연하지. 수연아. 넌 들어가서 설거지 좀 할래?”
수연의 엄마가 시한폭탄 같은 딸을 주방으로 보내려 했지만 이미 수연은 앞치마를 걸치고 주문서를 가져왔다.
“야, 하 윤조! 근데 넌 얼마 전 부터 학원 다닌다 하지 않았냐? 무슨 학원이 학교 안전점검하는 날 같이 쉬냐?”
본인만큼이나 깐깐한 까만 뿔테 안경 너머로 수연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우리 일단 찐만두 3인분이랑, 어묵 6개랑 튀김 한 사발.”
“근데 내가 어제 뭘 봤냐면, 너랑 석수랑 같이 교문을 나가더라구... 풍기문란이면 근신이 3일인가? 그리고 근신 3일이면 내신에 벌점... 맞지?”
“같은 학교 학생끼리 교문도 같이 못 나서냐? 그게 풍기문란이냐?.... 쿨피스 한 병도 잊지말고 줘.”
윤조는 수연의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른 주방 가서 설거지 좀 하래도!!”
수연은 못마땅한 듯 윤조를 노려보고 섰다가 엄마의 서슬에 못 이겨 주방으로 사라졌다.
“ 빨리 나왔지? 배들 얼마나 고파 그래... 얼른 먹어!..
네 어서 오세요….”
방금 튀긴 군만두가 접시에 소복히 담겨 나왔을때 분식집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